"이건 제 양심의 문제 입니다."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완곡하게 사의를 재확인하는 정도겠거니 했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습니다. 어조는 차분했지만 태도는 단호했고, 표현은 완곡했지만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판사 출신 이자 3선 국회의원이기에 발언의 정치적 맥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지난 주 금요일, 사표를 제출한 이후 국무총리가 이례적으로 즉시 사표를 반려했고, 사표 반려는 대통령과 상의된 것이란 청와대의 설명이 이어졌고, 여당에서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인터뷰를 하기 약 50분 전 청와대에서는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의 연계가 국민연금 장기 가입자나 현재 중장년층에게 불리하지 않다는 내용의, 예정에 없던 긴급 브리핑까지 열렸습니다. 전날 최원영 청와대 고용복지 수석은 불화나 갈등은 없었다는 해명까지 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모를 리 없는 진영 전 장관이지만, 그는 작심한 듯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새누리당과 일부 언론은 일제히 장관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무책임하다, 발등을 찍었다, 배신자다 등등.. 심지어 국회 주변에서는 진 전 장관이 의원 시절부터 손해보기 싫어하는 이기적인 성품이었다는 술자리 뒷담화 수준의 이야기까지 흘러나왔습니다. 각자의 생각과 입장에 따라 여러가지 평가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 장관이 '자신을 품어준 사람의 발등을 찍은 배신자'라는 평가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2.
영화 "월드워Z"를 보면 난데없이 좀비가 나타나 전 지구를 초토화시킵니다. 유일하게 도시 주변에 거대한 방벽을 쌓아 한동안 평온을 유지하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좀비의 등장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주인공은 그곳 정보국 관계자에게 좀비가 나타날 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정보국 관계자는 좀비란게 진짜 나타날 줄은 몰랐다고 말합니다. 그럼 왜 방벽을 쌓았느냐고 하자 그는 '검은 금요일' 테러 사건 이후 정보국의 의사 결정 과정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수집된 정보를 토대로 의사결정을 위한 토론을 할 때 10명 가운데 1명은 무조건 같은 정보를 반대로 해석하고 그에 따라 반대 의견을 내도록 역할을 준다는 겁니다. 듣도 보도 못한 좀비라는 이상징후를 접했을 때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무시하는게 합리적인 반응이겠지만 단 1명 만큼은 '그런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가정하고 반대 의견을 개진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지난 정부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사업을 기어이 추진하겠다고 했을 때 권도엽,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 이만의 환경부장관, 고흥길 특임장관를 비롯해 유관 부처 장관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유관 부처 장관들 뿐 아니라 여당과 정부 부처, 각종 국책연구소등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여러 가지 계산과 이해관계, 생각들이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였을 겁니다. '내가 모시는 대통령이 의지를 가지고 그런 방향으로 추진을 원한다' 는 이유 말입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각종 비리와 심각한 녹조 현상등 4대강 사업의 후유증이 차츰 불거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보스를 중심으로 일치단결!' 스피릿이 보여주는 폐해 입니다. 당시 인사들은 자신을 중용하고 품어준 대통령에 대한 신의는 지켰으니 '배신자'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을 이른바 '충신'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요? 그들은 과연 자신의 업무와, 보다 더 중요하게는 국민에 대한 신의는 지킨 것인가요?
3.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연계하는 방안이 적절한가 여부에 대해서 의견이 첨예하게 갈립니다. 그것도 영화의 예처럼 1명이 아니라 적지 않은 전문가와 시민단체들이 반대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 (전 주무부처 장관 마저도 반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비판을 피해간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있다는 의지와 신념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라며 국무위원들과 수석들에게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기초연금은 국내 최고의 관련 전문가들도 어려워하고 헷갈려 하는 복잡한 문제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의견이 100% 옳다고 단언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이건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밀고 나갈 문제가 아닙니다. 반대 의견도 들어보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치밀하게 검증하고 필요할 경우 수정하거나 방향을 아예 틀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추진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민주적 소통의 문제이지 의지와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민주적 소통이 필요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당연히 반대 의견이 나올 수 밖에 없고, 반대로 반대 의견이 전혀 없다면 그건 의사결정 과정이 건강하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민주주의 원칙이 잘 갖춰진 사회에서는 반대 의견 또는 소수 의견이 소중히 다뤄집니다. 그런 면에서 청와대와 새누리당에서는 진 전 장관의 이른바 '내부'에서의 반대 의견을 도리어 존중하고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진 장관에 대해 서운할 수 있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배신자' '발등 찍는자'라는 낙인이라면 그건 민주적 소통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태도입니다.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2008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미국 광우병 쇠고기 파동이 정국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라이스 전 장관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미국 규탄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라이스 장관은 당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불쾌해하기는 커녕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민주주의는 원래 좀 시끄러운 (noisy) 것이죠. 시끄러운 민주주의가 조용한 독재보다 낫습니다."
4.
물론 진 전 장관이 무조건 잘했다는 건 아닙니다. 대선 당시 당 정책위의장을 맡았을 때 분명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연계하는 방안에 대해서 검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누리당 주장'에 따르면 당시의 공약도 모든 노인에게 20만원 지급이 아니라 국민연금과의 연계해서 지급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복지부 장관이 된 이후 정책을 보다 꼼꼼히 살펴보다 보면 생각이 바뀔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 장관은 왜 생각이 바뀌었는지, 국민연금과 연계하면 왜 안된다고 보는지, 공약을 만들 당시에는 어떤 생각이었는지 등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습니다. '국민연금과의 연계를 반대하고 그것이 소신이었는데 정부안이 어쩔수 없이 그렇게 결정됐다'고 만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무책임하다는 오해를 살 수 있는 부분입니다. 또, 진정 그것이 소신이었다면 정부안이 결정되기 이전에 '무력감을 느낀다'는 식의 사의설을 흘릴게 아니라 보다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고 타 부처 그리고 청와대와 보다 적극적으로 의견 조율을 하는 등 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배신자' 라는 소모적이고 성숙하지 못한 힐난과 달리 이런 지적들은 더 파헤쳐지고 더 깊이 다뤄져야 합니다. 올바른 정책 추진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관련하여 SBS 심영구 기자의 훌륭한 글을 소개합니다.
[취재파일] 유시민과 진영…사퇴에도 품위가 필요하다 (클릭)
5.
진영 전 장관은 이제 국회의원 신분으로 돌아갔습니다. 진 전 장관 그동안 자신의 행보를 소신과 양심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소신과 양심이 진짜 소신과 양심인지,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무책임한 사의였는지, 아니면 국민을 배신하지 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는지 여부를 판가름하는 것은 이후의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소신을 지키기 위해 취했던 행동의 무게가 크면 클수록 더 그렇습니다. 기초연금 정부안은 이제 법률안 마련을 거쳐 국회 의결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진 장관은 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국회에서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진 전 장관, 아니 진 의원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진 장관의 사퇴에 박수를 쳤던 사람들, 손가락질을 했던 사람들 모두가 지켜볼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진 의원이 국회에서, 당 내에서 취하는 태도를 보고 그간의 행보가 진정 소신과 양심에 따른 직언이었는지 여부를 판단할 것입니다. 저 역시 진 전 장관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그때까지 유보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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