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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취재란 "'잘 하려고 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

기자 선·후배의 글 여기저기서 방영 중인 미국 드라마 ‘뉴스룸(The Newsroom,HBO)의 장면과 대사를 인용한 구절을 봅니다. 그만큼 보도와 관련한 언론의 속성을 잘 담아냈기 때문일 겁니다. 개인적으로 특히 다음 대사에서 무릎을 치며 감탄했습니다. 

A half an hour later, we retracted the story.
30분 뒤, 우리는 (앞서 보도한) 기사를 철회했습니다.
*주: 뉴스룸의 보도국에서 앞서 의욕적으로 보도한 단독 기사의 취재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뒤, 해당 기사를 철회하는 상황입니다.

And we report the same thing as everybody else even though we knew we were probably wrong.
그리고 그날, 우리는 틀릴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들과 같은 뉴스를 내보냈죠.

We didn't trust anything anymore.
더 이상 어느 것도 믿을 수 없었거든요.

We just stopped being good at-
우리는 ‘잘 하려고 하는 것’을 멈추게 됐어요.
- 시즌 2, 극중 뉴스룸 앵커 '윌 맥어보이'의 대사 가운데


 
부끄럽게도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위험을 감수하고 세상을 바꿀만한 기사에 도전해 본 적도, 그러다가 미끄러져 다쳐본 적도, 아직은 없습니다. 하는 일이라곤 근근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른 시선으로 접근해 보려 노력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결과적으로 남들과 다를 바 없는 기사를 출고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자가 위험을 감수하게 되는 일의 발생 여부가 본인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취재 과정에서 사건 기자는 매 순간 가치판단 때문에 혼란을 느낍니다. 최근에 제가 겪은 일도 그랬습니다.

그 날은 오후 늦게, 후배 기자가 취재하는 사건 기사에 도움을 주라는 캡의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당시 메인 뉴스에 나간 후배 기사의 전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013-08-27]

사고 장면 사라진 블랙박스 영상, 알고보니…

<앵커>

교통사고를 낸 택시기사가 사고 장면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을 다른 영상으로 바꿔치기했다가 덜미를 잡혔습니다. 김학휘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지난 6월 28일 새벽 경기도 성남시의 한 도로.

빨간불인데도 무시하고 직진하던 택시가 유턴하던 차를 그대로 들이받습니다.

경찰이 사고 차량을 경찰서로 견인하려 했지만, 기사는 막무가내로 택시를 회사로 끌고 갔습니다.

몇 시간 뒤 택시 회사가 경찰에 블랙박스 영상을 제출했는데 사고 순간 장면이 없었습니다.

택시 회사는 사고 충격으로 영상이 지워진 것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박성호/경기 성남수정경찰서 교통조사계장 : 최근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블랙박스의 경우 교통사고 충격을 받을 경우 영상이 지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찰이 속아 넘어갈 것이라 생각을 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경찰이 블랙박스를 분석한 결과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사고를 낸 택시 색깔은 회색인데 제출된 블랙박스 영상에 나온 택시는 주황색이었습니다.

다른 택시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로 바꿔치기한 겁니다.

경찰은 사고를 낸 택시 기사와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바꿔 제출한 택시회사 배차과장 등 2명을 불구속 입건했습니다.

김학휘 기자 hwi@sbs.co.kr


사건은 여러 모로 흥미로웠습니다. 택시 회사가 증거자료로 제출한 블랙박스 영상에 사고 순간 장면이 사라졌다, 처음엔 사고 충격으로 영상이 지워진 것 같다고 주장했는데 알고 보니 사고를 낸 기사와 회사 관계자가 일부러 메모리카드를 바꿔치기 한 것이었다….

후배가 경찰을 상대로 취재를 하고 있는 동안 저는 같은 시각, 해당 택시회사에 도착했습니다. 배차과장이라는 사람은 방송사 기자와 카메라를 보더니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사정인 즉슨, 이랬습니다. 

요즘 택시 회사들은 일과가 끝나면 운전 기사로부터 당일 근무한 시간에 한해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수거한다고 합니다. 신호 위반이랄지, 근무 태만 등을 검사하겠다는 명목이라고요. 배차과장이 이것 보라며 흔드는 조그만 우유팩에 담긴 메모리카드가 수십 개였습니다. 비슷한 제품인데다 겉에 딱히 표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헷갈리기 십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날그날 운전기사들은 메모리카드를 집어들고 나가 운전을 하고, 끝나면 다시 제출하는 식으로 관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경찰은 당신 알고서 의도적으로 그런거지? 아니 그런데 우리는 미쳤어요? 그걸 의도적으로 하게? 실수로 한 겁니다. 바뀐 사실은 인정 하는데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건 아니었다는 얘기지... 그게 표시 나 있는 것도 아니고 차량 번호 써있는 것도 아니고 잠깐 실수할 수도 있어요. 근데 경찰한테 시인하고 갖다준다고까지 얘기했는데…"

"뭘 잘못줬냐고 했더니 (사고차량 기사가) 아니 그 칩을 본 칩을 줘야되는데 다른 게 간 것 같다 그래요. 그래서 내가 사무장 자고 있는 걸 깨워서 야 이 칩이 바뀌었다고 하니까 칩을 갖다줘라 ** 경찰서에. 그러고 사무장 시켜서 나가려고 하는데 마침 그때 (경찰서에서) 두 양반이 왔더라고. 와서 이거를 고의적으로 회사가 가담을 해서 은폐려니 조작이니. 난 어이가 없어서."

"아니 우리가 보험에 안들어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가해면 어차피 우리가 신호위반했다 그러면 운전자만 형사 처벌 받으면 되는 거지. 회사까지 처벌 받는 건 없잖아요. 회사는 어차피 공제조합에 가입이 되어있으니까 그거에 사용해서 보험처리 해주면 그만인데 우리가 고의적으로 은폐할리가 뭐가 있어요."

"통상적으로 봤을 때는 우리가 그걸 바꿀 일이 없어요. 현장에서 칩이 왔는지도 몰랐어. 우리는. 사실은. 왜냐면 칩은 현장에서 경찰들이 떼 가거든. 그러니 거기서 알아서 해주고 당신이 가해요 당신이 피해요 정해주면 나머지 부분은 우리가 그쪽 보험회사하고 연결해서 과실만큼 주고 우리가 과실만큼 또 받고 그런 시스템으로 되어있는게 통상적인 사고 처리인데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그거를... 공제조합에 보험이 안들어있는 회사도 아니고. 그걸 뭐하러 하냐고."

관계자의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내뱉는 말에 갸웃했습니다. 표현은 안했지만, 어쩌면 경찰이 무리하게 조사를 한 건 아닌가, 한 건 노려보겠다며 의도치 않게 실수한 걸 크게 키운 건 아닐까, 경찰의 주장대로 기사를 작성했다가는 큰일 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회사 측의 말대로라면 정말 바꿔치기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없고, 메모리카드가 잘못 제출됐다는 사실을 알고서 다시 경찰서로 가려던 길에 경찰들을 맞닥뜨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취재가 똑바로 된다면, 기사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아직 혐의가 확실히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언론사들을 상대로 검거 사실을 알린 경찰의 성급함이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택시회사에서 빠져나와 후배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까지 취재된 사항을 말하고 저의 의견을 전했습니다. 이미 다른 언론사들은 경찰 주장을 신뢰한 기사들을 작성해 온라인 출고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경찰의 주장도 크로스체크해 볼 필요가 있겠어. 누가 이렇게 바로 들킬 거짓말을 하려 했겠어. 적어도 회사 측 입장을 반영해 중립적으로 접근할 필요..."

"선배, 경찰서에 와서 확실한 증거를 확인했어요. 배차과장이 사무실에서 해당 영상을 돌려보고 일부러 다른 메모리카드를 건네는 장면이 잘 담긴 CCTV가 있어요. 같이 기소된 사람들 중에 자백한 사람도 있고요."

그날, 해당 사건에 대한 사실여부를 떠나 기자로서 해 볼 수 있는 합리적 의심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말을 듣고,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지적 시점이 아닌) 사람의 관점에서 작성하는 일의 취약성 말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증거 은닉도 미수에 그쳤고, 사람이 다친 것도, 큰 피해액이 발생한 사건도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아찔했습니다. 순간 후배의 정보가 아니었으면, 저는 제 취재내용을 믿고 상사에게 더 강한 어조로 어필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만큼은 제 눈 앞에서 진실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심정적으로 더 다가가 있었고, 그를 신뢰하는 것이 제 선에선 가장 최선의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함께 틀리면, 그래도 괜찮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주변의 상황을 둘러보고 비슷한 방향으로 비슷한 방식으로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기 쉽습니다. 다른 목소리를 낼 때 받아야 하는 스트레스는 정말 큽니다. 확신에 대한 입증을 책임져야 할 때는 외롭고, 또 혼란스럽습니다. 남들만큼만 해도 기본은 하는데, 거기서 좀 더 노력하고 좀 더 고민하면 오히려 위험을 부담해야 할 지도 모르는 일. 초년병이지만 제가 느끼는 취재의 딜레마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세상을 바꾸는 기사는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할 때에야 비로소 탄생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조금이라도 관성적으로 움직이려 했다면 반성하고, 다시 혈기왕성한 사건기자로 현장을 누벼야겠다고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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