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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지나간 아베는 돌아오지 않는다

뉴욕의 동쪽과 서쪽…2013 유엔총회의 단상

[월드리포트] 지나간 아베는 돌아오지 않는다
매년 열리는 유엔총회는 뉴요커들에겐 달갑지 않은 행사다. 보름 가까이 계속되는 살인적인 교통체증 때문이다. 9월 하순에 열리는 각국 정상들의 기조연설 기간에는 유엔본부가 있는 맨해튼 동쪽의 도로 곳곳이 겹겹이 차단된다. 오바마 미 대통령이 유엔 기조연설을 했던 지난 24일에도 교통지옥이 재현됐다. 오죽하면 반기문 사무총장이 공식기자 회견 서두에 "뉴욕 시민들의 인내와 협조에 깊게 감사드린다"고 말했을까?

CBS 방송은 아예 이 내용을 별도기사로 다뤘다. 기자는 교통정체에 묶인 차량 운전자들에게 물었다. "반기문 총장이 미안하다고 하던데요?" 운전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뉴스 한꼭지로 구성했다. "유어 웰컴(You are welcome)", "마음의 준비를 했으니 걱정안해도 됩니다"라는 친절한 대답부터 "이제는 좀 다른 도시에서 하면 안되나요?"라는 불만섞인 대답, 그리고 가장 재미있는 압권은 한 노인의 "반기문이 누군가요?"였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인이 보는 유엔은 한국인의 감상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한국인에게 유엔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지만 미국인들에게는 '일관되게 인도주의의 이상을 쫓아야하는 점잖은 국제기구'일 수도 있고, '항상 미국이 많은 것을 부담해야하는 의무적 단체'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맨해튼의 서쪽 컬럼비아대학교에선?

SBS 취재팀은 오늘(25일) 유엔본부가 있는 동쪽이 아닌 서쪽의 컬럼비아 대학교로 향했다. 유엔총회가 한창이지만 작지만 의미있는 세미나가 열렸다. 바로 일본군 강제위안부를 주제로한 아시아 역사학자들의 세미나였다. 토론주제가 된 것은 한 한국계 설치미술가의 작품이었다. 맨해튼 한 복판에 '위안부 구함(Comfort women wanted)'이라는 광고물을 설치하는 이색 프로젝트를 선보여 화제가 됐던 예술가 이창진씨, 그녀가 만든 위안부 피해자 인터뷰 영상과 작품을 감상하고 석학들이 토론하는 자리였다. 공교롭게도 이 행사 직후에는 또 '아베 노믹스'에 대한 세미나가 같은 캠퍼스 안에서 연이어 열리는 일정이었다. 학교 관계자는 지난 주 아베 총리의 방문 가능성을 취재팀에 알려줬었다. 방문 가능성을 타진해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던 모양이다. 가변성이 높은 일정이었지만 아베가 나타날 가능성은 높았다. 아마도 일본 기자들도 몰랐던 숨은 일정이었을 것이다.

신선한 특종의 꿈을 안고 혹시나하며 기다렸지만 아베는 오지 않았다. 대신 스마트폰으로 그가 맨해튼 남쪽의 뉴욕증권거래소에 나타나 거래 마감을 알리는 종을 울리는 모습을 봤다. 오후 4시였다. '아베 노믹스'를 주제로 한 세미나 시작 시간은 4시15분, 그의 일정을 감안해 잡아놓은 시간이었을까? 하지만 그는 깜짝쇼를 벌이지 않았다. 친분이 있는 저명한 일본학자가 주최한 세미나였지만 아베는 오지 않았다. 증권거래소에서 웃으며 종을 울리는 아베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얼굴이 사무실로 돌아오는 나의 머리 속에 맴돌았다. 헛수고한 스텝들을 택시 안에서 건조한 농담으로 달래며 허탕친 특파원,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아베는 그렇게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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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군국주의자로 불러라" 아베의 역설논법

이날 오전 아베는 뉴욕의 동쪽, 허드슨연구소에서 연설을 가졌던 모양이다. 보수성향의 이 기관은 아마도 그에게 편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당당히 말했다. "나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은 일본인에게 적극적 평화주의의 깃발을 자랑스럽게 짊어지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아베는 또 말했다. "일본의 바로 옆에는 군비 지출이 적어도 일본의 2배에 달하고, 매년 10% 이상의 군비 증강을 20년 이상 줄기차게 해 온 나라가 있다. 일본은 11년 만에 방위비를 증액했지만 겨우 0.8% 올리는데 그쳤다. 나를 우경 군국주의자로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라."

아베를 기다린 우리는 순진했었다. 그는 애초부터 컬럼비아대학에는 올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뉴욕에서 위안부 문제를 대하기엔 버거웠을 것이다. 그는 캠퍼스에서 그를 기다린 미국인, 한국인, 그리고 몇몇 일본인들을 그렇게 지나쳐갔다.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미국시간 26일로 예정된 그의 유엔총회 연설은 전쟁 중 성폭력 피해자 지원 문제를 언급할 것이라고 산케이신문은 전했다. 정부 차원의 사과를 요구하는 피해자들의 요구를 이번엔 이렇게 지나치려는 모양이다. 예상 지원 금액은 1억엔, 한화로 11억원이다.

지난해 유엔총회를 위해 뉴욕에 왔던 김성환 전 외교장관은 이런 말을 했었다고 한다. "과거 일본 정치인들은 그래도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있었는데, 전후 세대 일본 정치인들은 그런게 없다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배우질 못했으니 걸핏하면 이웃나라 국민들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한다는거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아베는 1954년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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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뉴욕의 서쪽에서…우리에게 남은 것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유엔총회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시리아에 대한 군사공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란의 로하니 대통령은 오바마와의 만남을 난색을 표하며 거절했다. 중국, 러시아, 한국의 대표도 곧 연설을 가진다. 한.일, 한.중, 한.미 외교장관 회담이 이틀 동안 연속으로 열린다. 외교 전문가가 아닌 이들에게 이 회담의 성과는 아마도 쉽게 와닿지 않을 것이다. 아니 성과는 없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화합과 조율, 협력의 장은 열렸지만 모두가 자기의 말을 하고있다.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도 무엇을 양보하고 인정할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은 듯 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작은 세미나에 참석한 한 일본 학생은 이런 말을 했다. "지금 본 피해자들의 인터뷰와 설치예술 작품을 왜 일본에서 보여주지 않는 겁니까? 그런 계획은 없습니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를 줄 수 있을텐데요."  예술가 이창진씨는 답했다. "곧 일본에서도 전시할 생각입니다." 뉴욕의 동쪽과 뉴욕의 서쪽 풍경은 이런 식으로 달랐다. 유엔총회가 열리는데도 그랬다. 매년 가을이면 교통정체만을 걱정하는 뉴요커들의 모습이 어쩌면 자연스럽다. 우리를 지나친 아베는 그렇게 그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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