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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저항의 도시 '글렌데일'을 아십니까?

'소녀상 건립' 계기로 미국내 日 우파 준동

[월드리포트] 저항의 도시 '글렌데일'을 아십니까?
 LA 특파원인 제게는 요즘 한가지 업무가 더 생겼습니다. 지국 사무실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글렌데일시 중앙도서관을 가끔 둘러보는 일이 그것입니다. 행여 도서관 앞에 모셔져 있는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에 일본 우파 지지자들이 불순한 행위를 저지르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섭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 일 없습니다.

 어제도 퇴근길에 소녀상이 세워져 있는 도서관을 찾아봤습니다. 한인 부부로 보이는 두 분이 석양에 긴 그림자를 남기며 참배를 마치고 막 자리를 떠나던 참이었습니다. 주차하느라 그 분들과 미처 얘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정말 숙연한 분위기였습니다. 소녀상 앞엔 이 부부 외에 여러 방문객이 바친 듯한 소담스런 국화 화분 10여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더군요. 휴대전화를 꺼내 몇 컷 찍어뒀습니다. 지난 14일에는 서울에서 온 독도 아카데미 학생들이 소녀상 앞에서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고, 같은 날 위안부 피해자 고 이용녀 할머니를 기리는 추모 행렬 역시 이곳을 찾았습니다. 소녀상은 건립된 지 한 달도 채 안돼서 우리 역사와 뿌리를 되돌아 보게 하는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 한가지. 왜 글렌데일이라는 낯선 도시에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섰을까요? 소녀상 건립은 약 7만달러의 동포 성금과 글렌데일시의 부지 제공으로 성사됐는데 왜 이 도시는 땅까지 내놓으면서 소녀상을 세우는 데에 적극적이었을까요? 대답 속에는 또 하나의 낯선 이름, 아르메이나인들의 아픈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글렌데일시는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서도 매우 특이한 도시입니다. 전체 인구 20만명 중 3분의 1 이상이 아르메니아인입니다.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들은 과거 1천년 이상을 페르시아, 동로마제국, 아랍, 몽골,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장구한 세월동안 강대국들의 탄압으로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으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강인한 민족입니다. 1차 대전 당시엔 독립을 요구했다가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의해 강제 이주 당하고 무려 150만명이 인종청소라는 이름으로 학살 당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끝까지 버텨냈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이런 아르메니아들이 약 140만명이 살고 있는데요. 1970년대 이란 회교혁명 때 이란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1차로 대거 이동해왔고,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되면서 또다시 대규모 미국 유입이 이뤄졌습니다. 이들 저항민족이 모여 사는 도시가 바로 글렌데일시입니다.

[월드리포트] 저항


 글렌데일시 운영의 핵심은 대부분 아르메니아인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소녀상 건립을 추진했던 시의원 4명 가운데 2명은 아르메니아 출신입니다. 현 시장은 독일계이지만 과거 시장의 대부분도 아르메니아인 출신들이었습니다. 소녀상 건립에 대한 이들의 강력한 의지는 시의회 의결에서부터 실제 건립까지 석 달 남짓 일관되게 나타났는데요. 어떤 시 의원은 의결과정에서 일본계 주민들로부터 수백 통의 항의 이 메일을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폭로하기도 했고요. 어떤 의원은 “왜 글렌데일에 소녀상을 세우느냐”는 한 일본 기자의 질문에 “그걸 나에게 묻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며 일침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기나긴 세월 주변 강대국들의 압제 속에서도 살아남은 두 민족의 정서가 무언의 공감을 이룬 결과물이 바로 소녀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소녀상 건립을 전후해 LA 주변에선 과거엔 볼 수 없었던 현상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LA 주재 일본 총영사관과 미국 내 일본계, 그 중에서도 우파 성향 주민들의 움직임이 가시화했다는 점입니다.

 소녀상 건립을 추진한 단체는 가주한미포럼이라는 한인단체인데 소녀상 건립 이후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로부터 편지 몇 통과 이 메일, 우편물을 받았다고 합니다. “70년도 더 지난 일을 들춰내는 이유가 무엇이냐” “소녀상 건립이 장기적으론 한일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비교적 점잖은 항의에서부터 “왜 한국인들은 그토록 싫어하는 일본인들이 만든 자동차는 좋아하느냐”는 비아냥까지 다양하다고 합니다. 드물긴 하지만 “소녀상 건립을 계기로 전혀 몰랐던 역사를 알게 됐다”는 반응도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 내 일본계 주민들의 복잡한 정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가운데 LA 주재 일본 총영사관의 니이미 준 총영사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는데요. 글렌데일 소녀상 건립이 추진될 당시에도 신문에 기고하면서까지 반대의사를 표시하더니, 최근엔 또 다른 기림 조형물 건립이 논의되고 있는 LA인근 부에나팍 시청을 찾아가 시장과 시의원을 만나 일본 정부의 입장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일본 정부는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하고 배상을 완료했다’는 겁니다. 당시 일본 총영사는 부에나팍시에 ‘도움이 되는 교류사업’도 하고 싶다는 뜻도 밝힌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마디로 “기림비만 세우지 않으면 필요한 재정적 도움을 주겠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익 성향 일본계의 움직임인데요. 이미 보도돼서 알고 계신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만 LA 곳곳에 일본 군국주의 상징인 욱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달 초 다운타운 내 ‘리틀 도쿄’에 일장기가 햇살 모양으로 뻗어나가는 욱일기 문양을 하트 모양 스티커가 도로 표지판 곳곳에 붙어있다가 한인단체의 고발로 철거되기도 했습니다. 이달 중순에는 한인타운 근처 한 매장건물에 욱일기와 일본 자객인 닌자 모양을 그린 벽화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벽화는 일본 화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졌지만 욱일기 스티커는 누구 소행인지, 무슨 의도인지 아직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장비까지 동원해 높이 6미터가 넘는 높은 도로 표지판에까지 스티커를 붙인 것을 보면 한 개인이 한 짓이라기 보다는 복수의 개인이나 단체의 소행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다음달 초엔 우익성향을 보여온 일본의 한 유력 일간지가 LA에 특별 취재단을 보낸다고 합니다. 글렌데일시도 방문하고 일본계 단체, 한인단체 회장들을 잇따라 만나면서 평화의 소녀상 건립 문제를 계기로 촉발된 미국 내 반일 감정 등을 취재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비록 국적이나 입장은 다르지만 같은 기자로서 현 상황을 보다 냉정한 시각으로 진단 보도함으로써 자국 내 비뚤어진 국수주의적 시각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길 조심스럽게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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