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평온이 불안한 이집트인들

무력진압 이후…피의 악순환에 빠진 이집트

[취재파일] 평온이 불안한 이집트인들
군이 장악한 카이로…밤은 유령도시

사막 빛깔로 도색한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길목 곳곳을 지키는 카이로는 안전해 보입니다. 집 안에서 움츠리고 있던 시민들도 하나 둘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고, 오전에는 잠깐씩 은행과 관공서도 문을 엽니다. 수백구의 시신들이 쏟아져 나왔던 광장과 모스크도 학살의 흔적을 지우려는 청소작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녁만 되면 도시엔 다시 공포가 그늘을 드리웁니다. 통금 시간을 어겼다가 군에 체포되기라도 할까봐 (비상사태가 선포되면서 군은 영장없이 민간인을 구금할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걸음을 서두릅니다. 관광객과 나일강의 화려한 수상식당들이 눈길을 사로 잡았던 인구 2천만의 아랍권 최대도시 카이로는 이렇게 유령도시로 변합니다.

학살에 대한 ‘분노’의 온도차

국제적 비난을 불러 일으킨 카이로 학살이 벌어진 지 일주일. 하지만 이집트 내의 분위기는 바깥에서 느끼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집권시절 무슬림 형제단의 온갖 실정에 대한 실망감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 즉 세속주의를 통해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고 생각하는 많은 이집트인들에게 무슬림 형제단이 추진했던 이슬람 국가화는 이집트를 수렁에 빠뜨릴 것이라는 공포를 불러 일으킨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무르시 정권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이 일어났고, ‘군’이라도 상관없다는 판단의 오류를 가져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인식 때문인지 광장과 거리에서 수많은 어린이와 여성들까지 희생됐지만, 이집트인 상당수의 반응은 안타깝기는 해도 책임은 무슬림 형제단에 있다는 쪽입니다. 군부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위진압을 예고해 왔지만, 무슬림 형제단 측은 오히려 광장에 어린이와 여성을 대거 동반하면서 인간 방패막이로 삼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집트 언론들은 특히 연일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채 도심 곳곳에서 군과 경찰, 불특정 다수를 향해 총을 난사하는 무슬림 형제단원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민들에게 이런 인식을 강요하는 듯 하기도 합니다.

반인간적 학살에 대한 국제적 분노는 그래서인지 무슬림 형제단 지지자들을 제외한 시민들에게까지는 그리 광범위하게 확산되지 않는 듯 합니다. 국제적 지명도가 높은 엘 바라데이가 부통령직을 사퇴하면서 학살에 항의했지만, 이집트 국내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한 그의 사퇴는 시민들의 인식 변화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엘 바라데이의 ‘무책임한 사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무슬림 500
숨죽인 무슬림 형제단…보복의 길로 들어서나

 하지만 무력에 의존한 불안한 평온이 얼마나 유지될 지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가족을 잃은 수많은 희생자 유족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슬람 국가를 지지했던 생각이 조금 다른 평범한 시민에서 신과 죽어간 자의 이름으로 복수를 다짐하는 ‘지하드’ 전사가 될 지 모르겠습니다. 

학살에 대한 분노는 당장은 군부의 힘에 눌려 있지만 선거로 얻은 권력을 부당하게 탈취당했다고 여기는 무슬림 형제단 등 이슬람 진영에겐 ‘정치적 재기’를 위한 엄청난 자양분이 될 게 분명합니다. 더구나 군부가 무슬림 형제단 등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조직 해산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분노를 무기로 한 정치적 재기는 훨씬 과격하고 근본주의적 행태를 띤 무장투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이죠.
 
'낙타 근성'과 보복의 공포

아랍권, 특히 이집트 사람들에겐 ‘낙타 근성’이 있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광활한 사막의 거친 환경에 적응하면서 수천년을 버텨 온 아랍인들에게 낙타는 교통수단으로 영양공급원으로 없어서는 안될 동반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낙타들 뒤끝이 무섭습니다. 사막 더위에 낙타들을 좀 거칠게 다루거나 심한 채찍질을 한 다음날, 낙타몰이꾼들이 숨진 채 발견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낙타몰이꾼이 잠든 사이, 낮에 학대를 당했던 낙타가 긴 다리를 굽혀 무릎으로 잠든 주인의 목을 지긋이 눌러 숨통을 끊어 버리는 겁니다.

총과 탱크를 앞세운 군부의 무력시위에 일단은 숨을 죽이기 시작한 이집트의 이슬람 진영은 아마도 주인이 잠들기를 기다리는 낙타 같은 심정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제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 평온이 찾아 왔다고 느끼는 순간 그들은 가슴깊이 새겨진 2013년 카이로 학살의 기억을 보복의 실행으로 되살릴 겁니다.

겉으로 찾아온 반쪽짜리 평온은 그래서 많은 이집트인들에게 오히려 더 큰 공포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일단 정세를 장악한 이집트 군부와 그 지지자들은 채찍을 손에 쥔 낙타몰이꾼인 셈이지만, 낙타의 무릎이 언제 숨통을 누를 지 모를 불안감에 잠들 수 없는 불면의 날들이 계속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