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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왜 흑인만 수상한가요?" 여성 판사의 송곳 판결

뉴욕경찰 불심검문 '위헌'판결…파장과 의미

[월드리포트] "왜 흑인만 수상한가요?" 여성 판사의 송곳 판결
사람 많은 뉴욕은 관광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크고 작은 범죄도 끊이지 않는다. 지금도 한국에서 방문객이 오면 "타임스퀘어와 지하철 같은 혼잡한 곳에 가실 땐 스마트폰과 지갑을 주의하시라"고 충고하곤 한다. 하지만 악명높았던 뉴욕의 범죄율은 꾸준한 하락세이다. 일단 '슬럼가'로 유명한 맨해튼 북쪽 할렘가의 범죄가 급격히 줄었다. 지금은 연 발생건수가 뉴욕 남쪽과 중심가보다 적다. 간헐적으로 '애플 피킹'(스마트폰 절도), 성범죄 소식이 크게 보도되지만 맨해튼 보다는 인근 퀸즈의 브룩클린 등으로 범죄의 무대가 옮겨가는 느낌이다.

범죄와의 전쟁 20년…인종차별의 그림자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뉴욕시의 범죄와의 전쟁이 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이 정책은 "모든 골목마다 경찰차 1대가 있다"는 물량공세로 유명하다. 당연히 큰 효과를 봤다. 지금도 중산층 이상의 뉴요커들은 이 정책을 칭찬하곤 한다. 한편으론 이런 칭찬에는 '흑인과 히스패닉계 등 유색인종의 범죄를 사전차단한 것이 비결'이라는 암묵적인 인식이 포함돼있다. 결국 '그들'을 옥죄는데 성공한 것이 도시를 바꿨다는 식이다.

물론 범죄자가 흑인 등 유색인종인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이민자가 특히 많은 뉴욕 특성을 감안하면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 뉴욕에서 흑인과 히스패닉계 인구비율은 54%에 달한다. 미국 전체로 보면 백인 범죄자 수가 훨씬 많고 더 잔인하고 계획적이고 규모가 큰 범죄는 오히려 백인에 의한 것이 많다. 뉴욕에 유색인종이 많은 것이지 유색인종의 범죄가 특히 많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뉴욕시가 불심검문(stop and frisk)을 도입한 건 1990년대 부터,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이 취임한 2002년부터는 더 강화됐다. 특정 혐의가 보이지 않아도 경찰관의 자의적 판단에 따른 불심검문이 허용됐다. 뉴욕시 브롱스에 사는 의대학생 데이비드 플로이드 등 흑인 청년 4명은 2008년 함께 길을 걷다가 백인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았고 큰 모욕감을 느꼈다. 이들의 소송에 시민단체가 가세했고 집단소송으로 확대됐다. 오랜 법적 공방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저울추가 바뀌면서 결론을 내지 못했다.

셰인들린 판사 "정책 효과를 위해 인종차별 묵인했다"
 
뉴욕 연방지방법원의 시라 셰인들린 판사는 백인이고 여성이다. 불심검문을 위헌으로 규정한 이번 판결문은 증거로 수집된 경찰의 내부문서와 통계가 뒷받침됐다. 무려 195쪽에 이른다. 판결내용을 살펴보자.

"뉴욕 경찰은 적절한 이유없이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침해해 왔다. 피부색.인종 등을 기반으로 용의자를 추적하는 수사기법에 의지해왔다. 집을 나서면 누구나 언제든지 불심검문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 속에 살아서는 안된다. 고위공무원들이 자신들이 효과적이라고 믿는 정책을 위해 인종차별적 증거를 무시해왔다. 백인이었다면 피해보지 않을 사건이라도 흑인.라틴계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사례가 많았다."

뉴욕 연방법원의 자료에 따르면 2010년 1월부터 2012년 6월까지 이뤄진 뉴욕경찰의 불심검문에서 단지 '수상하다'는 이유로 검문대상이 된 흑인은 48.3%, 히스패닉계는 45.2%였다. 백인이 수상한 행동을 보여 검문대상이 된 경우는 39.9%였다. 시라 판사는 "흑인과 히스패닉의 행동이 객관적으로 백인의 같은 행동보다 더 수상하게 판단된다는 증거는 없다"고 판단 이유를 밝혔다. 현장 경찰의 주관과 선입관, 그리고 의도적 감시가 개입된 것이 통계에서 분명히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녀의 판결은 불심검문을 금지한 것은 아니다. 독립적인 감시관을 지정해 불심검문이 헌법에 따라 이뤄지는지 감시하도록 했다.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뉴요커들의 속내는?

뉴욕시 경찰과 블룸버그 시장의 저항은 완강하다. 블룸버그 시장은 "불심검문이 수천 명의 생명을 살렸다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치안유지 활동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판사가 위험한 결정을 내렸다"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의 말은 정책효과의 개량적 개념으론 맞을지도 모른다. 또 불심검문의 약화로 뉴욕의 범죄율이 높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그동안 잠재적 범죄용의자를 자의적으로 검문하면서 얻은 효과, 그리고 그로인한 시민의 권리침해의 무게를 저울질할 때 지금은 기본권의 침해가 효과보다 더 심각하다는 신호가 아닐까? '무자비한 1인 독재의 사회에선 오히려 범죄가 설 곳이 없다'는 명제의 연장선상에서 뉴욕경찰은 이제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뉴요커들은 느긋한 시선으로 "이제 또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시대가 달라진 만큼 공권력의 집행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뉴욕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기까진 아직도 갈길이 멀지만, 이번 판결도 그 중요한 한걸음이라는 의미이다.

'행정의 도사' 블룸버그 시장의 시각은 정책효과에 온통 쏠려있지만, 많은 뉴요커들에겐 불심검문은 진저리나는 인종차별의 잔재라는 인식이 더 강했던 셈이다. 더 현실적으론 이 판결은 갈수록 재력과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있는 미국내 소수민족, 특히 히스패닉계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준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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