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야스쿠니 신사의 정체는?

[취재파일] 야스쿠니 신사의 정체는?
일본의 패망일이기도 한 8월15일을 앞두고  야스쿠니 신사가 또 다시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1869년 6월 28일 메이지 일왕은 도쿠가와군과 일본 정부군이 벌인 보신(戊辰)전쟁에서 사망한 관군 3,588명의 명목을 빌기 위해 '도쿄초혼사'라는 신사의 건립을 지시합니다.

이 '도쿄초혼사'가 1879년 군(軍)의 요청에 의해 명칭을 바꾼 것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입니다.

결국 야스쿠니 신사는 이 당시 육해군성이 관할하는 신사로, 종교시설이 아닌 군사시설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육해군성이 야스쿠니 신사를 관할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전쟁 희생자를 일왕과 국가를 위해 죽은 영령으로 위령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전쟁 희생자를 재창출하는 역할을 수행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가 적은 글을 보면 야스쿠니 신사의 목적이 분명해 집니다.

“황송하게도 천황폐하께서 친히 참배하시는 모습을 엎드려 보았을 때 우리 같은 천한 산골 출신 사람들은 설령 칠팔십까지 살았더라도 병 따위로 죽어도 산속의 너구리도 울어주지 않는데 나라를 위해 죽었다고 천황폐하까지 참배해주시는 것을 보고 감전된 것처럼 기쁨과 고마움을 느꼈다.

그 후로는 괴로운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자식들은 영원히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밝아졌다” 2차 대전 이후 야스쿠니신사는 국가와의 공적인 관계가 단절되고 종교법인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연합국총사령관총사령부가 1945년 12월 15일 국가신도의 폐지와 엄격한 정교분리를 지시했기 때문인데요, 일본 헌법 제20조(정교분리원칙)는 국가와 종교가 공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신사에는 위패나 유골은 없고 합사한 신을 상징하는 거울과 검, 합사자 명부가 있는데 청일전쟁 이후에는 주로 대외 침략전쟁에서 사망한 군인, 군속이 합사 대상이 됐으며, 현재 약 246만 명이 합사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는 1978년 10월 17일, 극동국제군사재판소(도쿄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 14명이 포함돼 있습니다.

또 일본의 군속이나 군인으로 전쟁에 동원되었다가 사망한 한국인 약 21,000명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상태입니다.

야스쿠니의 부속시설인 '유슈칸'의 전시물을 살펴보면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은 전혀 보이지 않고 ‘국가를 위한 죽음’만이 강조돼 있습니다.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근대 일본의 대외 침략전쟁을 전부 일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겁니다.

일본 가미가제 특공대로 참가했던 젊은이들의 사진과 함께 당시에 사용된 전투기 등 각종 무기를 전시해 놓기도 했습니다.

역사를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2차세계대전은 일본이 아시아와 태평양의 여러 나라를 서방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시작했다는 잘못된 지식을 가르치고 있는 장소인 셈입니다.

결국 야스쿠니 신사에서 A급 전범을 분사하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여기서 문제가 끝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