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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큰 물고기 잡을 때는 그물코가 조금 커도 된다

[취재파일] 큰 물고기 잡을 때는 그물코가 조금 커도 된다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한 중소기업이 있습니다. 이 업체는 경영 비용을 줄이고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서 일부 공정을 분사했습니다. 원자재를 수입하는 회사와 가공하는 회사, 그리고 판매하는 회사로 쪼개서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책임 경영 차원에서 대주주가 자회사에 지분을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새로 신설된 일감 몰아주기 증여세 과세 대상에 포함됐습니다. 부당하게 자회사에 일감을 몰아줘 매출이 발생했다는 겁니다.

업체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중소기업은 안정적인 판로와 자재 확보를 위해서 자회사와 거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덩치 큰 기업 사이에서 버틸 수도 있고 직원들 월급날도 맞출 수 있습니다. 지금 제도대로라면 사업 연관성이 낮고 시너지 효과를 내기 어려운 자회사만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요?"

일부 대기업 또는 대기업 오너들이 자회사에 일거리 물량을 몰아줘 자회사의 수익을 높이고 주식 가치를 급등시켜 증여세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활용해 온 사실이 감사원의 감사 결과 드러났습니다. 이에 대기업의 부당한 경제력 집중과 부의 대물림을 막기 위해서 일감몰아주기 증여세 과세 제도가 도입됐습니다. 국세청은 증여세 신고 대상자 1만여 명, 법인 6200여 곳에 안내문을 이미 발송했습니다. 그리고 자진 신고 납부 기한이 바로 오늘, 7월 31일까지입니다.

일감 몰아주기 증여세, 취지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준에 있습니다. 회사 매출 규모에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과세 기준을 정하다 보니 대기업은 전체 과세 대상의 1%에 그쳤고, 나머지는 모두 중견 또는 중소기업인들이 포함된 겁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중소기업인들은 갑작스런 세금 부과에 현금 마련할 길이 막막하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가뜩이나 불경기에 돌아오는 직원들 월급날 맞추기도 빠듯한데 갑자기 천만 원에서 많게는 1억 원이 넘는 현금을 어디서 마련하냐는 겁니다. 대출을 받거나 보유 주식을 팔아서 세금을 내게 생겼다고 울상입니다. 물론 전체 과세 대상에서 대기업들이 내는 개별 세액이 훨씬 더 많지만 영업 이익을 감안할 경우 이익 규모가 작은 중소. 중견기업이 받는 과세 충격은 훨씬 더 큰 상황입니다.
중소기업_500

정부에서는 1970년대 중소기업계열화 촉진법 등을 통해 생산 및 기술의 전문화와 계열화 촉진을 유도했습니다. 중소기업의 도산을 막고 부실 법인을 살려 기업 활동의 한 축으로 삼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지금 일감 몰아주기 과세 대상이란 부메랑으로 되돌아온 겁니다. 중소기업들은 업체별로 과중한 세금 부담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생각하는 방법이 바로 회사 간 합병입니다. 분리 운영해 온 회사를 하나로 합치는 겁니다. 하지만 합병 법인에서는 중복 업무가 발생하고 잉여 인력을 정리할 수밖에 없어 일자리 감소로 이어진다는 게 중소기업의 생각입니다. 또 지방에 공장을 세웠거나, 이제 막 투자를 시작한 업체들로서는 합병을 생각할 수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자회사의 경영을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겁니다. 일감몰아주기 증여세는 수혜법인의 지배 주주와 그 친족으로 주식 보유 비율이 3%를 초과하는 경우 과세 대상입니다. 일부 대기업 총수 일가를 겨냥한 겁니다. 하지만 중소기업들 가운데에도 가업을 잇거나 가족끼리 소규모로 출자해 오랜 시간 경영에 참여한 업체가 많습니다. 그럴 경우 대기업과 마찬가지의 지배구조를 갖게 돼 과세대상에 포함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른바 ‘바지 사장’ 을 내세워 세금을 피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겁니다.

일부에서는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 발생한 매출은 부당한 이득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다른 곳에 나눠줄 수 있는 일감을 특수 관계 법인에 몰아줬기 때문에 기업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나 방식은 똑같다는 겁니다. 따라서 엄정한 조세 행정 집행을 위해 일감몰아주기 증여세 제도를 일괄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말하는 가장 좋은 해법은 매출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제도를 확대하는 겁니다.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지 않기 위해 세무 조사도 축소하고 있는 현 상황에 맞춰 제도 취지를 살릴 수 있도록 매출 규모가 큰 기업부터 적용하고 중견. 중소기업은 단계적으로 확대 적용하자는 겁니다.

한 마디로 큰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데 그물코가 너무 작고, 촘촘하면 애꿎은 작은 물고기까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중소기업들의 부담이 크단 목소리가 커지자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지난 27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제주하계포럼에서 기업들이 일감 몰아주기 과세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만큼 완화 방안을 검토해 세제개편안에 반영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중소기업에 대해선 대주주 지분율이나 특수법인과의 거래 비율 요건을 높여주고 대기업은 지분율에 따라 과세 금액을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단 현 부총리의 발언은 불황 속 늘어난 세금에 허덕이던 중소기업계에는 단비 같은 소식입니다. 작은 물고기가 살아날 수 있는 숨통이 트인 셈입니다. 하지만, 중소기업 뿐 아니라 대기업까지 완화 대상에 포함된 것에 대해 경제민주화의 의지가 후퇴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경제민주화의 후퇴가 아닌 일보 진전이 될 수 있도록 일감 몰아주기 증여세 제도의 현명한 개선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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