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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친고제 폐지, 성범죄 수사의 틀을 바꾼다

[취재파일] 친고제 폐지, 성범죄 수사의 틀을 바꾼다
성폭력 특례법 개정 등으로 오늘(19일)부터 성폭력 범죄에 있어 친고죄와 반의사불벌죄 조항이 폐지됐습니다.

친고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가해자를 기소(재판에 넘김)할 수 있다는 것이고, 반의사불법죄는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의사가 있어야 기소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두 개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① 친고죄: 제3자가 다른 사람의 성범죄 피해 사실을 고발하면 경찰이 피해자를 찾아가 조사를 하겠죠? 하지만, 피해 당사자가 직접 고소장을 제출해야 가해자에 대한 공식 수사가 진행됩니다. 피해자가 '수사 싫어요'하면 가해자를 부르지도 않고, 수사는 시작도 되지 않습니다.

② 반의사불법죄: 경찰이 일단 피해자와 가해자를 모두 만나 수사를 공식적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검찰까지 넘어가 기소가 되기 전, 또는 재판 과정에서도 피해자가 '가해자 처벌을 원하지 않아요' 하면 사건이 종결됩니다. 친고죄와는 가해자 조사 시점 등에 있어 조금 다르죠?

이처럼 과거에도 성범죄 사건에서 경찰은 고소, 고발, 신고 등 다양한 과정을 통해 수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통 수사 첫 단계에서 경찰은 피해자에게 "고소할 거냐? 처벌을 원하나?" 이런 걸 물어봅니다. 처벌 의사가 없으면 수사가 중단됩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피해자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나? 큰 피해가 아니면 고소까지 할 필요 있었냐? 가해자와 그냥 합의를 해라"는 등의 말을 해 물의를 빚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가해자들은 경찰 수사-검찰 수사-기소-재판 등의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피해자에게 꾸준히 합의를 요구해 옵니다. 합의만 되면 곧바로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건 종결 이후 합의 내용을 지키지 않은 가해자들도 많아서 성범죄 피해자들의 고통이 가중되는 경우도 비일비재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친고죄 폐지로 경찰은 절도, 살인, 사기 사건처럼 곧바로 사건 수사에 착수하게 됩니다.

지난달 발생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재미교포 여대생 성추행 의혹사건이 그랬죠. 피해여성이 아닌 제3자가 신고를 했고, 워싱턴 경찰은 신속히 피해 여성을 만나 피해진술 청취했습니다. 곧바로 입건이 된 것이죠. 미국 경찰은 "고소할 거냐? 처벌하고 싶으냐?" 이런 걸 묻지도 않습니다.

친고죄 조항이 없어지면서 가장 큰 숙제를 떠안은 곳이 바로 경찰입니다. 성범죄 수사의 틀을 100%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뭘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하나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 피해자 조사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야

미국 경찰의 성범죄 사건 대응 매뉴얼을 살펴봤습니다. 처음 사건을 인지한 이후 피해자와 경찰관의 관계 설정, 그리고 교감 등을 굉장히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친고죄가 있을 경우 '가해자를 처벌하겠다는 분명한  의사를 가진 피해자'를 대상으로 수사가 이뤄지지만 미국처럼 친고죄가 없는 상황에선 '수사 협조에 미온적인 피해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피해자들을 보호하고, 설득해서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것이 바로 경찰의 의무인 겁니다.

우리 경찰도 현재 성범죄 수사 매뉴얼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 개인의 정보나 수사과정에서의 발언을 어떻게 보호하고 관리해야 하는 지 등이 적혀 있는 수준입니다. 미국처럼 구체적인 피해자 접근 방식에 대한 연구와 실천방안이 부족합니다.

미국 경찰은 피해자 수사 대응 단계를 1) 일반 경찰관의 1차 조사 2) 형사급 전담수사관의 2차 조사 3) 기소, 재판 중의 피해자 관리 4) 사건 이후 피해자 심리 파악까지 꼼꼼히 나눠서 연구하고 있더군요. 관련 시민단체와 연계해 피해자 보호와 심리 상담을 주도하는 것도 경찰입니다. 관련 자료1 <클릭> 자료2 <클릭>

경찰 관련


(2) 경찰의 사건 인지수사 논란


친고죄가 폐지되면 경찰은 언제 어떻게 사건에 개입해야 할까요?

한 변호사 분은 피해자가 수사 과정에서 노출될 우려가 높은 만큼 지금처럼 경찰은 고소 고발이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경찰이 먼저 사건을 인지해 수사에 나서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겁니다. 친고죄가 폐지됐으니 양측의 합의가 있더라도 가해자가 처벌을 피할 수 없고, 이것으로 처벌 강화의 효과는 충분하다는 겁니다.

전직 경찰간부의 의견은 다릅니다. 친고죄 폐지 자체가 경찰에게 '고소.고발이 없어도 적극적으로 수사에 착수하라'는 책임과 의무를 부여했다는 겁니다. 법률적으로 볼 때 이를 피할 수도 없다는 설명입니다. 개인적으론 현실론보다는 책임론에 더 공감이 갑니다. 일선 경찰관들도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이 적지 않더군요.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면서 성범죄를 막을 수 있는 묘책이 필요합니다.

(3) 과학적 성범죄 수사가 절실

친고죄 폐지와 함께 달라진 것이 바로 사법부의 성범죄 양형입니다. 지난 3월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성범죄의 형량을 대폭 높였는데요. 이달부터 적용되고 있습니다.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양형 기준이 높아지면 재판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습니다. 성범죄자에게 무거운 형벌을 내려야 하는데, 대부분 성범죄 사건의 증거가 진술뿐이기 때문입니다. 재판부로서는 진술만으로 무거운 형벌을 내리기가 부담스러운 것이죠.

실제로 그동안 경찰의 성범죄 수사는 진술 증거에만 치중해 있었습니다. 합리적이고, 일관적인 진술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피해자에게 과도한 진술을 요구해왔죠. 가해자의 성기 모양이 어떻고, 성폭행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묻고 또 물었습니다. 재판부도 법정에서 피해자에게 이런 진술을 반복해서 묻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지난달에는 서울중앙지법의 한 성폭력 사건 재판 과정에서 판사가 12살의 지적장애 피해 아동에게 무리한 법정 진술을 요구했다며 서울지방변호사회가 항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었습니다. ( 관련 기사 클릭)

재판부로부터 무거운 형량의 판결을 받기 위해서는 진술이 아닌 DNA와 지문 등 구체적인 증거 수집이 더욱 중요해진 겁니다. 경찰이 과학 수사 역량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4) 전담 수사팀 구성

성범죄는 수사가 어렵습니다. 물리적 증거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노련하고 전문적인 수사관들이 필요합니다. 수사관들 사이에 수사 노하우와 내공이 공유되고 확산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성범죄 전담 수사팀 구성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단순히 성범죄 수사를 맡는 수준을 넘어 그 분야의 수사 역량을 축적 공유한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우리 경찰은 지난 2011년부터 각 지방경찰청과 지역 광역 수사대 일부에 아동 청소년 성범죄 전담팀을 가동해왔습니다. 하지만, 일선 경찰서에 성인 사건을 포함해 성범죄 전담팀을 갖춘 곳은 서울 관악경찰서 한 곳에 불과합니다. 올 하반기부터 성범죄 우범 지역에 있는 경찰서마다 성범죄 전담팀을 구성한다고 하네요.

거듭 말하지만, 전담팀 구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범죄에 대한 정보수집부터 수사 노하우 공유, 과학 수사팀과의 협조 체계, 그리고 외부 기관과 시민단체와의 연계까지 갖춰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시스템 없이 성범죄 수사 업무만 전담팀에 던져 놓을 경우 오히려 각종 민원과 사건사고가 불거질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내용은 경찰뿐 아니라 검찰에도 적용이 되겠죠?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미국 범죄드라마 SUV(Special Victim unit/ 클릭)에 나오는 성범죄 전담팀의 활약을 볼 수 있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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