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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규슈 올레, 한국 관광객을 유혹하다

[취재파일] 규슈 올레, 한국 관광객을 유혹하다
일본 규슈가 지난해 2월부터 제주의 ‘올레’를 수입해 ‘규슈 올레’를 개장했습니다. 지금까지 문을 연 코스는 8곳, 각 코스 길이는 10-15km로 제주 올레와 달리 각각 7개 현에 흩어져 있습니다. 한번 걷기 시작하면 4,5시간 정도 걸리고, 코스마다 마을을 지나는 길과 숲 속을 지나는 길이 반복됩니다. 지난주 일본 규슈 관광추진기구의 초대로 규슈 올레를 다녀왔습니다. 국내 여행사 관계자들, 걷기 동호회원들이 함께 걸었습니다. 울창한 숲과 자연에서 나오는 건강한 공기...일본의 문화와 역사를 접할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걷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 규슈는 왜 제주 올레를 수입했을까요?

# 숨겨진 보석을 들춰내다

잘 아시겠지만, 일본은 4개의 큰 섬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가장 남쪽에 있는 규슈가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규슈’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온천입니다. 유후인, 벳부...하지만 규슈에는 현지인들에게 더 좋은 평가를 받는 온천이 많습니다. 사가 현, 가고시마 현 등의 지역에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온천과 일본 문화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는 고가의 일본식 온천 호텔(료칸)들이 있다는데요, 한국인들에게는 후쿠오카 공항으로 입국해 비교적 가깝고 경치 좋은 유후인이나 벳부의 온천을 이용하는 게 가장 실속 있는 코스이기 때문에 이들 지역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규슈에 올레가 생기면서 이들 지역의 관광지도 다시 조명 받고 있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사가의 다케오, 미야자키의 다카치호, 가고시마의 기리시마가 대표적입니다. 온천이 대표적인 지역이었는데, 특히 기리시마는 이 일대에서 가장 비싼 료칸이 있다고 하더군요. 저희가 묵었던 호텔 주변에도 곳곳에서 흰 연기가 솟아나오고 있는데 모두 유황온천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온천 뿐 만이 아닙니다. 깊고 울창한 숲을 지나, 계곡이 이어지는 자연 경관. 일본의 깊숙한 곳에 이런 천혜의 자연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다카치호의 계곡은 현지인들이나 알던 관광지로 주변에 산책길이 나 있는 게 전부였는데, 올레로 연결되면서 방문객이 급증했다고 합니다. 기리시마 숲속의 폭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숲 속에 있는지라 찾는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규슈 올레를 찾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랜드마크로, 이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관광 포인트가 됐습니다.
[일8리]규슈/올레
# “한국인들 오세요”

머릿속 고민을 잠시 접어두고 눈 앞에 나 있는 길을 따라 걷는 건 누가 뭐래도 즐거운 입니다. 그 중에서 제가 가장 흥미로웠던 건 일본 사람들을 만났던 순간이었습니다. 작은 마을길을 걷다가 어느새 울창한 숲길이 펼쳐지기도 하고, 또 끝을 알 수 없는 삼나무 숲길을 걷다 보면 싱그러움 가득한 녹차 밭이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줍니다. ‘차 밭에 분명 주인이 있을텐데’ 보니, 주인집 앞마당으로 올레가 연결돼 있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다른 길은 없어 보이는데 이 앞을 지나도 될까’ 하고 봤더니 녹차 밭에서 일하다 나온 할머니가 굽은 허리를 두드리며 인사를 건네더군요, ‘곤니찌와’.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 속에 온몸으로 느껴지는 친절함이란. 카스테라 빵과 딸기잼 까지 나눠주시더니 손가락으로 지붕 처마에 달린 표지판을 가리켰습니다. 표지판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화장실’. 올레를 지나는 손님들, 특히 한국인들을 위해 자신의 앞마당은 물론 화장실을 기꺼이 내준 겁니다. 물론 한국어로 쓰여 있었지요.

규슈 올레에는 이런 매력이 있습니다. 도쿄나 오사카 등 대도시에 가면 신사나 놀이시설, 대형 쇼핑몰을 구경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길을 지나며 일본 사람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었던 건 관광을 떠나 큰 배움이었습니다. 낮은 담, 검은 기와지붕,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큰 소리로 웃지 않던 사람들...올레를 걷다보면 이런 일본의 시골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한번은 올레를 걷다 신사를 지나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신사에서 녹차를 한 잔 씩 마시고 있었습니다. 걷느라 땀도 많이 흘렸을 텐데 따뜻한 녹차라니. 들여다봤더니 신사의 관리인이 올레 손님들을 그냥 놔주질 않는 겁니다. 기둥에 ‘녹차 한 잔 마시고 가세요’란 표지판이 붙어있었는데, 이걸 본 한국인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겠다 싶었습니다. 신사의 관리인이 그 앞에서 녹차를 만들어 주며 더듬더듬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자연 경관에 사로잡혀 저절로 움직이던 발걸음을 잠시 쉬게 했습니다. 왜 한국어를 배우냐고 묻자, 이렇게 답하더군요. ‘올레를 지나는 사람들과 얘길 해보고 싶었어요’

1년 동안 규슈 올레를 방문한 사람들은 1만 3천여 명. 이 가운데 8천여 명이 한국인이라고 합니다. 이미 제주 올레에 익숙하고 걷기 열풍이 불고 있는 한국인들이 최대의 손님인 셈입니다. 그런 한국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지,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호의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 호의가 ‘홍보’ 내지는 ‘프로모션’ 등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방인에 대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 그 자체라고 느꼈습니다. 다케오 코스로 인해 다케오 시의 방문객과 관광수입은 3배가 늘었습니다. 다카치호 코스가 생기면서 수년전 문을 닫았던 학교는 올레 손님들을 위한 식당으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이들은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잊지않고 온전히 전합니다. 식당에선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메뉴를 만들어 팔고, 메뉴에 대한 설명도 칠판에 한국어로 써놓습니다. ‘비지의 고로케’, ‘부추의 무친 요리’...서툰 한국어에 오히려 정이 느껴지는 건 저 뿐만이 아닐 겁니다.

#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길

인정합니다. 전 규슈 올레를 걸으며 일본의 시골 마을에 푹 빠진 것 같습니다. 그런 저에게도 보완점은 보입니다. 일단 제주 올레는 모두 연결돼 있어 제주도에 도착한 관광객들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코스를 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규슈 올레 8개 코스는 모두 흩어져 있습니다. 한나절 걷고 다른 코스를 걸으려면 최소 3시간 정도는 차로 이동을 해야 합니다. 걷는 재미만 추구하기엔 따져봐야 할 게 많다는 얘기입니다. 이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것이 접근성입니다. 올레의 시작점을 찾기 위해 관광객들은 숙소에서 나와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합니다. 왠지 현대인들이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한답시고 휘트니스까지 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올레의 표식이 있긴 하지만, 정작 규슈의 마을사람들도 올레를 잘 걷지 않다 보니 중간에 숲 속에서 길을 잃으면 난감해지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규슈 올레는 ‘오로지 길을 걷기 위한 곳’만은 아니라는 데에 반전이 있습니다. 일본의 자연에 나를 치유하고, 숨은 보석을 발견하며 감동받고, 친절을 마음속에 담아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일본인들과 우리가 진정으로 교류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규슈 올레는 매년 제주 올레에 자문료를 냅니다. 자연 풍광이 좋은 곳에 인간 친화적인 길을 만들겠다는 제주 올레의 정신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새로운 길을 낼 때에는 제주 올레 관계자들과 답사도 다니고 보완점에 대한 의견도 교류합니다. 한일 양국은 독도나 역사 문제로 해묵은 논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공간에서 대화와 이해를 하려는 마음 없이, 그저 하고픈 말만 쏟아내기도 합니다. 전 지난 3박 4일 동안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자연이 만나는 ‘길’에 서 있었습니다. 편견도, 갈등도 없는,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에서 진정한 교류가 뭔지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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