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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철망에 갇힌 꽃들…꽃은 죄가 없다!

철망에 갇힌 멸종위기 식물

[취재파일] 철망에 갇힌 꽃들…꽃은 죄가 없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의 일부분이다. 존재와 본질, 그리고 인식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의 이름은 단순히 “부르는 의미”를 넘어서 그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내포한다.

광릉요강꽃.
광릉요강꽃_1
낯설지는 않지만 꽤나 독특한 이름이다. 누군가가 고민하며 지어줬을 이 이름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추측대로 경기도 포천의 광릉, 그리고 전통 '실내 변기'였던 요강과 관련 있다. 광릉요강꽃은 1930년대 조선의 제7대 왕이었던 세조의 능인 광릉 주변에서 처음 발견됐는데 꽃잎의 모양이 요강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8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 광릉요강꽃은 단순히 “광릉에서 발견된 요강 모양의 꽃이 피는 식물” 이란 의미를 넘어 더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 국내에서 자생하는 식물 4천 9백여 종 가운데 하나의 존재감 없어 보이는 종(種)이지만 환경부가 멸종위기 야생식물로 지정한 77종 밖에 안 되는 귀하디귀한 육상 식물 종(種)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도 1급에 속한, 제일 위기 상황에 처한 9종의 희귀식물로 최우선적으로 보호하고 지켜야할 우리 고유의 식물자산 가운데 하나란 의미 말이다.

광릉요강꽃은 난초과의 여러해살이 식물인데 생육조건이 아주 까다롭다고 한다. 꽃이 피는 것도 환경에 따라서 들쑥날쑥해서 어느 해엔 꽃을 피우지만 그 다음 해엔 꽃을 피우지 않기도 한다. 꽃을 피워도 열매가 다 맺히는 건 아니어서 종자에 의한 번식도 어려울 것으로 추정된다. 

환경부와 산림청이 증식 방법을 연구해 봤지만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전국 서식지의 개체수를 모두 합쳐서 추산해도 남한에서는 채 수백 개체 밖에 남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는 꽃이다.

강원도 화천의 한 산자락.

작은 개울을 건너서 가파른 산비탈을 올라가면 중턱 한 가운데 높은 철망이 쳐져 있다. 높이 2미터의 철망 울타리 위로 가시철망까지 둘러쳐져 있다. 둘레 길이가 177미터, 1,455제곱미터의 면적이 이 철망에 둘러싸여 있다. 흡사 군사시설 같아 보이지만 철망 안쪽에 있는 것이라곤 그저 풀과 나무뿐이다.
광릉요강꽃_2

그러나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요강 같이 생긴 꽃이 피는 식물” 광릉요강꽃이 숨어 있다. 이곳의 서식지는 불과 6년 전인 2007년 5월, 민간인 제보에 의해 처음 확인됐다. 발견 당시 32개체였던 광릉요강꽃은 안타깝게도 입소문이 퍼지면서 급격히 개체수가 감소했다. 전국에서 사진작가와 개인 식물연구가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서식지가 훼손되고 꽃은 불법채취 당했다. 2년 만에 12개체까지 줄어들자 환경부 산하 원주지방환경청은 어쩔 수 없이 이 일대에 보호펜스를 설치했다. 

이후 개체 수는 차츰 증가하기 시작했지만 훼손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지난해에는 5개체를 불법 채취해 간 흔적까지 발견됐다. 원주지방환경청은 다시 보호시설 상단과 하단에 철망을 둘러치는 보강공사까지 벌였다. 다행이 올해는 19개체가 솟아나 이 가운데 13개체가 꽃을 피웠다.

광릉요강꽃과 외형은 물론 희소성에서도 아주 흡사한 꽃이 또 하나 있다. 털복주머니란.  이름에서 짐작하듯이 꽃잎은 복주머니를 닮았고 그 표면에 솜털이 붙어있는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남한에서는 현재 강원도에서만 발견되고 있는데 “광릉요강꽃”보다 더 멸종위기에 처한 식물이다.
털복주머니란_1

강원도 정선의 이 털복주머니란 서식지에도 지난 2009년부터 보호 철망이 설치돼 있다. 서식지가 최초 발견된 것은 2008년 5월이었는데 그해 6월에 6개체가 불법 채취된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철망 훼손시도가 있어서 2011년 2차 보강 작업이 있었다. 발견당시 34개체였던 털복주머니란은 한 때 27개체까지 줄었다가 다행히 올해 41개체까지 다시 증가했다. 털복주머니란이 북방계 식물인 점을 감안한다면 강원도 정선의 서식지는 더 없이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

멸종이란 단순히 수많은 식물 종류 가운데 하나의 종(種)이 사라지는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다. 수많은 시간동안 진화를 거쳐 생존해온 인류와 똑같은 지구상의 생물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효용성으로 의미를 국한시켜도 우리는 대체 불가능한 하나의 유전자원, 생물자산을 잃게 되는 것이다. 환경의 변화와 자연스런 진화의 과정에서 이뤄지는 멸종조차 아쉬운데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이를 자초하는 건 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독미나리, 대흥란, 가시연꽃, 제주고사리삼. 모두 광릉요강꽃이나 털복주머니란처럼 철망에 둘러싸여 있는 멸종위기 식물이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철망에 갇혀 살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쩌다 우리 땅의 꽃들 조차 철망 너머로만 바라보는 처지가 된 걸까?”

심각하게 자문하고 해법을 고민해야할 때이다. 더 늦어 후회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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