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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96전 96패…그 아름다운 '떨림'에 반하다

'똥말'의 위대한 도전

[취재파일] 96전 96패…그 아름다운 '떨림'에 반하다
"갑자기 몸을 왜 떠는 거죠?"
"아는 거예요. 이제 곧 경주가 시작 된다는 것을."

직전 경기까지 95전 95패.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포기를 못했나 봅니다. 경주마로는 환갑에 가까운 8살. 현역 경주마 가운데 최다 출전이자, 최다 연패(연속 패배) 기록을 보유한 한 '똥말' 얘기 좀 하겠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차밍걸'입니다. 보드라운 털에 똘망똘망해 보이는 눈망울까지, 외모만큼은 정말 '차밍'했습니다. 그런데 경마팬들은 그녀를 왜 '똥말'이라고 부를까요?

차밍걸2
주인은 차밍걸을 빚 대신 받아다 키웠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왜소해서 비싼 돈 들여 살 말은 아니었습니다. 몸무게 430kg그램으로 많이 나가는 경주마들보다 100kg 가까이 작았습니다. 당연히 보폭도, 폐활량도 작아 경주마로는 불리한 말입니다.

하지만 차밍걸은 스스로 뿐 아니라 마주와 조교사, 기수들까지 어느 누구도 빨리 포기하는게 좋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96연속 패배라는 1922년 조선경마구락부가 생긴 이래 최다 연패 신기록을 세울 때까지 그녀는 열심히 뛰었습니다.

꾀를 부릴 줄 몰랐습니다. 잔병치레도 없었습니다. 다른 말들은 한 번 경기를 뛰면 한 달 이상 쉬는 편인데, 차밍걸은 한 달에 두번 씩 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독히 건강하고, 아프지도 못하는 이 시대의 평범한, 잘 나가지 못하는 아버지들을 닮았다고 하면 오바하는 걸까요.

차밍걸2
비록 우승은 한 차례도 못했지만 막상 꼴찌를 한 적도 별로 없었습니다. 우승권에서 멀어진 말들이 결승선을 앞두고 꾀를 부리며 덜 뛸 때, 차밍걸은 끝까지 악착같이 뛰는 바람에 꼴찌에서 2-3등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열정과 성실함이 기수도 마주도 차밍걸을 버릴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베팅을 하는 경마팬 입장에선 당연히 관심 밖의 말일텐데, 차밍걸은 팬이 오히려 자꾸 늘고 있습니다. 묵묵히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차밍걸의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럽답니다. 수원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한 아저씨 팬은 차밍걸이 경주에 나서는 날이면 가족들과 함께 경마장을 찾습니다. 1등은 한 번도 못하고, 소위 '갑'은 커녕 '을'도 못 되는 말이지만, 그렇게 열심히 뛰는 차밍걸에게서 본인 같은 소시민 다움을 느껴서라고 합니다.

차밍걸
문득 괜한 호들갑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냥 잘 못뛰는 경주마 한 마리일 뿐인데, 우리네 사람들이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그래도 시합 직전 떨고 있는 차밍걸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움직이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한편으론 짠하기도 하고, 좀체 식지 않는 그 열정이 존경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비록 그렇게 열심히 살지 못하는 제가 차밍걸에게서 이끌어 낸 모습일 뿐이라도 말이죠.

차밍걸은 지난 일요일에도 졌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끝에서 3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저도 더 열심히 살면서 차밍걸의 100번째 도전을 기대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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