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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단편이면 만들기 더 쉬운 거 아니야?" "NO!"

[취재파일] "단편이면 만들기 더 쉬운 거 아니야?" "NO!"
어제(28일) 새벽 폐막된 제 66회 칸 영화제에서 국내영화 <세이프>가 단편 부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 다들 전해 들으셨죠?. 한국영화가 칸 영화제 단편 부문에서 최고상에 해당하는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지난 1999년 송일곤 감독이 <소풍>으로 단편 부문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요.

<세이프>의 수상 소식은 영화를 만든 이가 젊은 30세 청년인 문병곤 감독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화제가 됐던 것 같습니다. 문 감독은 지난 2011년 당시에도 이미 중앙대 영화학과 졸업 작품이었던 단편 <불멸의 사나이>로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받았었는데요, 두 번째인 이번 영화로 덜컥 최고상까지 수상하는 진기록을 낳았지요. 첫 번째 단편인 <불멸의 사나이>는 7분 정도 되는, 단편 중에서도 아주 짧은 단편에 속하는데요. 저도 이번에 취재를 핑계 삼아 한 번 봤는데 정말 될성 싶은 떡잎이었더군요. 재미있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보길 추천드립니다.

영화 한편 만드는데 보통 인력과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 알고 계실 테죠. 문 감독은 13분 분량의 이번 영화 <세이프>를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더군요. 신영균문화재단 후원 공모에 발탁돼 500만 원을 지원받고 자비 300만 원 들여 총 800만 원으로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그마저도 지인들이 알음알음 스태프로 참여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영화의 장르는 필름의 길이에 따라 장편, 중편, 단편으로 나뉘는데요. '몇 분 이상은 중편!' 이렇게 딱! 정해진 건 아니지만 대개 30분 이하 분량의 영화를 단편이라고 하지요.

분량이 적으니 단편은 그만큼 만들기 쉬운 아마추어의 영역일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데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죠. 적확한 예는 아니지만, 비슷한 보기를 들자면, '시'와 '소설'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길이는 짧지만 시도 엄연히 문학의 한 장르입니다. 시를 쓸 때엔 압축미와 절제미가 관건이죠. 짧아도 들어갈 건 또 다 들어가야 하니까요. 기본적인 서사와 주제, 정서까지... 제대로 시 한편 쓰려다 보면 '차라리 오히려 몇 백페이지 소설을 한편 쓰고 말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겁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단편영화를 보는 묘미는 감독의 재능과 재기를 단박에 알아채는 데 있습니다. 10분 내외의 분량 동안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담아낸다? 식상하지 않은 소재와 주제로 시선을 붙잡아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완결성을 갖는 이야기를 하는 것, 보통 감독이라면 못해낼 일입니다. 단편을 장편으로 가는 징검다리 정도로 생각하지 말고 별개의 다른 장르로 봐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세이프>는 제가 근래 본 가장 재미있는 단편이었습니다. 영화는 불법 사행성 게임장 환전소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여대생이 가불금을 갚기 위해 사람들이 환전을 요구하는 돈의 일부를 몰래 빼돌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는데요, 여대생은 좁은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상황은 오히려 그녀가 예상치 못한 반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영화 세이프

영화는 현대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거대 금융 자본이 사람들이 맡기는 돈을 굴려 수수료를 더 많이 챙기려 하다가 결국 파산하게 된 현실을 은유했는데요, 영화 제목인 영단어 '세이프'(Safe)는 안전하다는 뜻과 함께 돈을 보관하는 '금고'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마지막엔 정말 소름 돋도록 충격적인 반전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13분 안에 펼쳐진다니, 궁금하지 않습니까? ^^

올해 칸 영화제 단편 부문은 이례적으로 심사위원 특별언급상이 두 작품이나 더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작품은 총 132개 나라에서 3천 5백여편이 출품됐고, 본선엔 9편이 선정됐는데요, 문 감독은 거기서 또 1등을 차지한 겁니다. 예술 작품을 스포츠 경기처럼 이해하는 건 곤란하지만, 그래도 정말 대단한 기록이죠.

칸 폐막식 뒤 만찬에서 이번 단편 부문 심사위원장인 제인 캠피온 감독이 문 감독에게 특별히 칭찬을 건넸다는 소식도 있더군요. 내용도 재미있고 마지막까지 긴장감 넘치는 연출이 훌륭했다고요. 참 남다른 언급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구요? 그건 제인 캠피온 감독 본인이 칸영화제 단편 부문 황금종려상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어쩌면 칸 단편 부문의 역대 최고 수혜자 중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제인 캠피온 감독은 영화 '피아노'로 지난 1993년, 칸 영화제 장편 부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감독으로 등극했죠.(당시 첸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와 공동수상했습니다. 장국영이 경극배우로 나왔던 영화요, 아시죠?) 바로 그 제인 캠피온이 '피아노'로 수상하기 정확하게 7년 전인 1986년, '필'이라는 영화로 칸 단편 부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습니다. 단편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그 여세를 몰아서 7년 후 장편 부문에서도 최고상을 받는, 그야말로 단편 장편 모두 최고상을 휩쓴 전설의 인물이 된 거죠.

감독은 그런 개인사 때문에라도, 칸 영화제 단편 부문의 가능성과 중요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누구보다 심혈을 기울여 수상작을 선정했겠죠. 더욱 뿌듯해지는 대목입니다.

한국 영화는 올해 칸 영화제 장편 경쟁 부문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단편 최고상 수상으로 지난해 베니스 영화제 황금 사자상(피에타:김기덕 감독) 수상에 이어 독립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 최고상(지슬:오멸)까지
세계 영화제에서 장르를 넓혀가며 저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평입니다. 정말 기자로서 전하면서도 뿌듯하고 즐거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문병곤 감독의 건투를 빌며, 한국영화의 '승승장구'를 기대합니다! ^^ 참, 더불어 단편영화의 매력을 느끼고 싶으시다면 곧 서울에서 열릴 '미장센 단편영화제'와 '세계단편영화제', '29초 영화제' 등에 참여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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