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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웃음 속 고통…'감정 노동의 그늘'

승무원 폭행한 대기업 임원 사표<br>반짝 관심에 끝날 문제인가

[취재파일] 웃음 속 고통…'감정 노동의 그늘'
문제가 됐던 라면입니다.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일종의 '특별식'이고 보통 비즈니스 클래스 이상부터 끓여주는 겁니다. 대기업 임원은 기내식으로 나온 밥이 마음에 안든다며 라면을 끓여달라고 했고 처음에 끓여서 올린 이 라면도 덜 익었다고 다시 끓여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끓여서 올린 라면은 짜다며 못먹겠다고 했죠. 이 과정에서 5~6차례의 승강이가 있었습니다.

물론 라면을 끓여달라는 요구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전후에 있었던 상식 밖의 행동들입니다. 항공사를 통해 확인해보니, 대기업 임원은 이륙 후 안전벨트를 채워 달라는 승무원의 요구에 불응했고, 안전을 위해 필요한 행동들을 불편하다는 이유로 거부했습니다. 그리고선 밥이 설익었다, 라면이 덜익었다, 라면이 짜다. 그러고도 마음에 안들었는지, 서비스를 한 승무원에게 잡지를 돌돌말아 눈 주위를 툭툭 치며 제대로 하라고 지적한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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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통해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해당 대기업은 임원을 보직해제하며 공식 사과문까지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보직해제 다음날 임원은 스스로 사표를 냈고 기업에선 바로 사표를 수리하면서 사건 자체는 일단락 되는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끝난 걸까요? 자신의 실제 감정과 무관하게 표정과 몸짓, 어조를 직무의 일부로 연기하며 고객을 대한 '감정노동자'들, 이들에게 이번 승무원의 이야기는 평소 자신들이 겪었던, 그리고 하고 싶었던 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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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내 역시 승무원입니다. 평소에도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좁은 기내에서는 뜻하지 않게 신체접촉이 일어나고 어떨때는 '이럴수가 있나' 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같은 승객과 신체 일부를 부딪히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 모든 상황은 웃으면서 넘겨야합니다. 얼마나 능숙하게 상황을 모면하느냐가 일을 얼마나 잘하느냐로 평가받는 이상한 직업입니다.

취재를 위해 또다른 승무원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자신의 동료는 한 승객에게 "발을 닦아라"는 요구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메뉴에 없는 '비빔밥'을 만들어 달라고도 하고 아이에게 줄 장난감을 구해달라며 윽박지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없는 음식을 만들수도, 없는 장난감을 만들수도 없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거죠.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일하는 점원 얘기는 더 심합니다. 다 쓴 화장품을 가져와 교환해달라고 소리를 치고, 안된다고 설명하면 사장을 나오라고 하고, 설명도 안듣고 소리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따귀를 때리기도 하고 백화점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거짓말 같은 이야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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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웃어야 하는 감정노동자들. 조사 결과 4명 중에 한 명이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도 웃으며 버텨야 하는 이들에겐 우울증은 직업병이나 마찬가집니다. 문제는 아직 판매직이나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이른바 '감정노동자'들에게 정신질환이나 우울증은 산업재해로 포함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조업의 경우 산업안전 보건법상 직무스트레스로 인한 심혈관 질환을 산업재해로 포함하는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죠.

유럽이 경우 직무스트레스를 제조업과 서비스업에 광범위하게 적용해 산업재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선 이른바 '진상고객'에 대해 백화점 차원에서 따로 관리를 하며 정기적으로 '점원을 방해하는 행위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고 합니다.

정신질환이나 우울증을 산업재해로 포함시킨다는 내용의 법안은 이미 지난해 10월 한 의원에 의해 발의됐습니다. 현재는 심의조차 못하고 계류중인 상태입니다. 정책적인 방어막이 절실하지만, 이들을 마치 수족부리듯 대하는 고객들의 인식 또한 바껴야할겁니다. 해외 사례처럼 이른바 진상 고객을 특별 관리하는 기업의 노력도 병행되야 합니다. 진상 임원과 사표, 반짝 관심으로 끝낼 문제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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