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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알쏭달쏭 심사 기준은? "나를 밟고 넘어서"

[취재파일] 알쏭달쏭 심사 기준은? "나를 밟고 넘어서"
1. 얼마 전, 실험적인 것으로 유명한 한 영화제 쪽 담당자와 대화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이번 영화제에서 본선에 오를 경쟁작을 결정하고 보니 놀라운 결과가 관찰되더라는 겁니다.

“저희 영화제 특성이 국내 내로라하는, 거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독님들이 심사위원이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감독님들이 수백 편 중에 골라낸 스무 편 정도 경쟁작이 모두 아마추어가 만든 거였어요. 이번에 영화 'xxx'이랑 'xxxx' 출신 연출부들도 많이 참여했는데도 말이죠. 심사위원들이 초등학생이나 일반 직장인이 만든 영화에 더 눈길을 주더라니까요."

"엥? 상업영화 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랑 경쟁해서 초등학생이 뽑혔다고요?"

"그렇다니까요. 우리도 본선작 발표하면서 세상에나, 이랬어요."

이 영화제엔 응모자격이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찍은 영화로 세상에 나설 수 있는 거죠. 그럼 상식적으로, 영화 깨나 만들어봤다 하는 기성 영화인들이 뽑혀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발하고 참신한 영화를 뽑겠다고 할 지언정, 기본적으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잘 만든 영화'에 대한 가치 판단은 비슷할 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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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대화를 듣다 보니 생각나는 사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지난주 최종 우승자가 발표된 오디션 프로그램 'SBS K팝스타2' 의 진출자 중 윤주석 씨입니다. 보아 심사위원이 귀여운 '푸우'를 닮았다고 했던 그 실력자 보컬입니다.

윤 씨는 최종 10인에 선정되지 못하고 탈락했는데요. 탈락 직전에 부른 노래 영상 한번 보시죠. 이날 부른 노래는 흑인 소울 음악의 경지에 이르렀다며 극찬을 받는 가수 '디 안젤로'의 '언타이틀'이라는 노래입니다. 우리말로 바꿔쓰면 느낌이 살지 않을 것 같아, 흔히 사용하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그루브감과 리듬감이 생명인 노래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UMHYK9kigNY

정말 '우리나라 사람이 이런 느낌을?'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대단하지 않나요. 이렇게 힘을 빼고 부드럽게 흐르는 느낌으로 부르는 감성적인 소울 장르를 '네오 소울'이라고 하는데요, 디 안젤로뿐 아니라 맥스웰, 라흐산패터슨, 에리카 바두 등 주로 흑인들이 이 느낌을 잘 살려내곤 하죠. 그런데 그야말로 네이티브, 태생이 한국인인 윤주석 씨가 이 장르 특유의 감성을 너무나 엄청나게 잘 살려냈던 거죠. 저는 집에서 누워서 TV 보다가 이 장면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우승은 윤주석, 너야 너!" 확신하면서요.

그런데 윤주석 씨는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탈락했습니다. 망치로 한대 얻어맞은 것 같더군요. 이날 심사위원들의 일치된 심사평은 '심하게 잘 부르는 건 알겠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원하는 참가자가 아니다'였습니다.

잘 부르는 건 맞는데 우리가 원하는 참가자가 아니다? 당장 'K팝스타'의 조연출로 있는 제 동기 PD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왜? 이게 무슨 뜻이야? 왜 잘하고도 떨어져야 해?' 동기 PD의 답은 '그게 우리 프로그램의 정체성이야. 그게 우리 심사위원들의 심사 기준이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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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잘 만들었는데도 초등학생에게 뒤져 경쟁작에 오르지 못하고, 잘 불렀는데도 생방송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한 안타까운 운명. 뭘까요? 왜 이들은 우리 기준으로 '잘'하고서도 선택을 받지 못하는 걸까요.

많은 이유가 있을 겁니다. 혹자는 누가 봐도 뛰어난 사람이 떨어져야만 해당 영화제와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과 주목도가 높아질 거라고 말하며 주최 측의 농간이라 말하기도 하고요, 누군가는 이들이 이미 관련 업계에 얼굴을 비춘 상태라 스타성이 부족해서였을 거라고 분석합니다. 그렇기도 하겠네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누군가 제3자를 심사, 혹은 평가하는 것의 한계를 생각해 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윤주석 씨가 기성 가수들의 발성으로 흑인 음악을 모창한다고 말했던 심사위원 3명 모두 누구보다 우리나라 가요계에 미국 팝시장에서 인기있는 장르들을 '들여오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박진영, 서태지와 아이들, 보아. 우리 대중가요계에서 가장 '메이저'한 위상을 갖고 있고, 흐름을 결정하는 이들이 악동뮤지션의 참신한 가사에 환호하는 모습에서 불균형하고 모순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건 저 뿐일까요.

하지만 역으로 보자면, 그렇기에, 이들이 누구보다 우리 음악업계의 가장 핵심에 서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도 남달랐을 겁니다. 다수의 대중이 반응하는 음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영역에 대한 동경이 컸을 겁니다. 상업영화 판에서 관객 수백 만명을 동원하는 힘을 가진 기성 감독들이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전철 삼아 그대로 따라오고 있는 후배 영화인들보다 어디서 나타난 지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일반인'들이 보여주는 거칠고 생뚱맞은 촬영기법에 환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자신은 대중의 취향을 읽어내는 능력으로 흥행의 거장이 됐지만, 실은 대중이야말로 자신이 부정하고 싶고 떼어버리고 싶은 '증(憎')의 대상인 겁니다.

4. 어쩌면 제 동기 PD가 말했듯이, 그것이야말로 영화제와 오디션 프로그램이 갖는 정체성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업계에 대한 이해도가 누구보다 높은 기성 전문가들이 새 피를 수혈하듯, 울타리 밖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들여오려 하는 것. 그래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업계의 외연을 넓히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 지금의 자신을 넘어서는 경지를 보여줄 후배가 나오길 바라는 것.

하산의 기준을 자신의 목을 베는 것이라고 정해둔 사부와 결투에서 이기려면, 사부가 만들어놓은 검법만 연구해선 안될 겁니다. 알쏭달쏭 심사 기준. 높은 의자에 올라 지금의 나를 평가하는 그들, 심사위원이 걸어온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돌아가 '나만의 길'을 만드는 자만이 다음 세대에 이르러 거장으로 불릴 수 있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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