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데스크칼럼] 북한의 위협, 그 이면에는…

[데스크칼럼] 북한의 위협, 그 이면에는…
북한의 최고 권력자 김정은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9년부터다. 이후 2010년 9월 28일 당 대표자회를 통해 공식 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고, 이듬 해에는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됐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에 대해선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름조차 '김정운'으로 잘못 알려질 정도였으니까...그 덕에 졸지에 유명해진 '인사'가 바로 후지모토 겐지다. 김정일의 요리사로 알려진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는 1982년부터 2001년까지 평양 주석궁에서 김정은과 함께 생활했다는 점에서 그를 가장 잘 아는 인물로 평가됐다. 도쿄 특파원 시절 그를 두 번 만났다.

이미지
그는 1990년 1월 어린 김정은을 처음 '알현' 했을 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당시 7살이던 대장 동지(김정은)는 내가 일본인이라는 말에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옆에서 장군님(김정일)이 '어이, 후지모토 씨야 인사드려야지'라는 말에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김정은의 성정을 보여주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농구하다가 팀원이 실수할 경우 이를 용납하지 않은 일, 구슬놀이를 하다가 화를 못 참고 형 정철의 얼굴에 구슬을 던진 일화 등등. 단순히 버릇없는 황태자의 기행으로만 치부하기 힘든 일이다. 

'후계자 김정은'(저자 이영종)이란 책에는, 10대 중반의 김정은이 할아버지의 연로한 부관을 발로 차며 '땅딸보'라 놀렸다는 대목이 나오고, 평양판 '형제의 난'이라 할 수 있는 우암각 습격 사건까지 기획한 것으로 묘사된다. "2009년 4월 초 평양 중구역에 자리한 특각에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보위군으로 불리는 보위부 소속 특수병력도 동원된 심야의 습격이었다. 김정일 일가만이 사용할 권한이 있는 초호화 별장인 이곳에 들어선 정예 요원들은 거침없이 집안 곳곳을 뒤졌다. 급작스런 가택수색에 제대로 저항조차 못하던 관리요원들과 특각에 머물던 몇몇 인사들이 끌려가다시피 차에 태워졌다. 우암각으로 불리는 이 별장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 평양 체류 때 주로 머무는 안가였다"

김정은의 일화는 사실여부를 떠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기 뜻대로 일이 되지 않을 경우 시쳇말로 '뚜껑'이 열리는 북한의 '최고 존엄'이란 것이다. 그런 그가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 "핵무기 공격으로 불바다를 맛볼 것" "최후 결전의 시각이 왔다" 등등을 운운하며 협박했는데 우리 반응은 너무 냉담했다. 라면사재기라도 하며 야단법석을 떨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으니 화가 나도 단단히 난 것 같다.

설상가상 격으로 '개성공단은 돈줄이 말라붙은 북한으로선 포기할 수 없는 곳이라는 등, 매년 현찰로 챙기는액수만도 8000만 달러며 북한 노동자 5만 4000여명이 일하며 부양가족까지 계산하면 30만 명이 매달려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 노동당 대남총책인 김양건은 "남조선 대결 광신자들이 '돈줄' 운운하며 우리의 존엄(김정은 지칭)을 모독했다"고 주장했다. 개성공단이 남북화해의 '최후 보루'든, 경제적 가치가 어떻든, 약속과 신뢰 파기에 대한 댓가가 어떻든, 다 필요없다는 식으로 나오는 걸 보면 감정이 많이 상한 것이 확실하다.

자존심이 상처를 입으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법이다. 젊을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남자 나이 30세를, 인성의 기초를 세운다 하여 이립(而立)이라 지칭한 것은, 참는 기초도 지금부터 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참을성이 생기면 작은 일을 크게 만들지 않는다. 분노는 어리석음과 동행하고 그 뒤엔 늘 회한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더 늦기 전에 알았으면 좋겠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