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뮤지컬 '그날들'이 법원으로 간 사연

[취재파일] 뮤지컬 '그날들'이 법원으로 간 사연
 경기도 남양주의 새 아파트 단지에 주민들이 입주를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던 사연을 취재한 적 있습니다. 아파트를 지어준 건설사와 건물주 사이에 갈등 때문이었는데요, 아파트 건물을 지어준 건설사가 건물주로부터 돈을 받지 못하자, 아파트에 입주하기로 한 주민들을 볼모로 잡고 돈을 달라고 항의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유치권을 행사한다'라고 하지요. 아파트 입구를 가로막고 멀쩡한 집에 주민들을 입주하지 못하게 하거나, 입주를 하게 하더라도 전기나 수도를 끊는 식입니다. 멋 모르고 이전 집에서 이삿짐을 들고 새 아파트로 입주하려던 주민들은 이삿짐을 근처 창고에 맡기고 주민회관이나 인근 여관을 전전하며 일주일 가까이 난민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잔금을 다 치른 입주 예정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치권은 건설사의 합법적인 권리입니다. 사안만 따지고 보면 건설사와 건물주가 돈 문제만 잘 해결했어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건설사 입장에서는 불경기에 거금을 들여 건물을 지어줬는데 주인이 대금을 지불하지 않고 나몰라라 하면 자기도 망하게 되는데,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겠지요. 그런데 이런 입주 예정자들과 같은 애꿎은 피해자가 생기는게 문제입니다. 이번엔 뮤지컬 공연이 그 피해자였습니다.

 그제 저녁 뮤지컬 '그날들' 제작사가 갑자기 '공연을 제때 개막하지 못할 것 같다'는 내용으로 연락을 해왔습니다. 뮤지컬 '그날들'은 국내 창작 뮤지컬로, 故 김광석의 노래들로 이뤄진 공연계의 화제작입니다. 제작진, 출연진도 화려한데다 새로지은 '대학로 뮤지컬 센터'란 곳에서 올라가는 공연이니, 개막을 기다린 관객들도 많았을 겁니다.

 그런데 공연장이 문제였습니다. 공연장을 지은 건설사 측이 건물주로부터 1백억 원이 넘는 공사대금을 받지 못했던 겁니다. 공연 개막은 오는 4일, 건설사는 건물내에 입주해 있는 커피숍이나 음식점이 아닌 '공연'을 볼모로 잡아 유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달 31일 제작진이 지하 공연장에서 무대 세팅을 마치고 리허설에 들어가려는 시점에 건설사 직원들이 공연장 입구를 가로막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공연장 내부에 있던 제작진 10여명은, 한번 나오면 아예 극장에 들어가지 못할까 걱정돼 그날 이후 극장 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감금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문제가 이렇게 흘러가자, 이제 공연팀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4일 개막'이라고 이미 홍보도 해온데다, 투자 등 돈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이미 표를 산 관객들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게다가 고인의 노래로 만드는 창작 뮤지컬인데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면 여러모로 곤란해지는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공연팀은 법원에 이 상황을 호소하기로 합니다. 건물 내에 들어와 있는 다른 시설들에는 유치권을 행사하지 않고 앞으로 개막할 공연만 볼모로 잡는건 부당하는 취지로, '공연 방해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습니다. 지난 금요일, 개막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공연팀은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도움을 호소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창작 예술을 하는 선후배들부터 시작해서, 문화를 사랑하는 많은 인사들, 언론사에도 말입니다. 곳곳에서 응원의 메시지가 보내졌고, 박원순 서울시장도 이 상황을 중재하고 싶다는 글을 SNS에 남겼다고 합니다.

이미지


 어제 법원은 공연팀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유치권은 정당한 권리지만, 공연이 끝날때까지 건설사가 공연을 방해할 수 없다는 내용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판결이 나오자 마자 극장에는 배우들이 모두 모여 모처럼 호흡을 맞췄습니다. 극적인 반전이 거듭되면서 감금(?)돼 있던 제작진도 무척이나 지친 표정이었지만, 개막을 이틀 앞두고 지칠 시간조차 없었을 겁니다. 극장 주변을 가로막고 있던 건설사 직원들은 다소 황당한 표정이었고, 혹시 발생할 사태에 대비해 오랜만에 무전기를 경찰들도 보였습니다. 법원 판결까지 받았으니 깨끗하게 손을 떼야 하는게 맞는 상황입니다. 

 공연팀이 리허설 하는 장면을 보다 극장을 나왔습니다. 극장이 부족하고, 창작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생소하고, 그래서 이런 문제에도 유연하게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부족하고...그동안 알게 모르게 이런 피해를 겪었던 사람들이 덩달아 글을 남기면서 뭔지 모르게 더 씁쓸해졌습니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공연팀의 노이즈 마케팅 아니냐'는 말도 했지만, 그 대가 치고는 너무 가혹한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아직 그 공사 대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은 채 그냥 공연만 할 수 있도록 법적 조치가 된 셈이지요. 물론 건물주가 건설사에 공사 대금을 주면 해결될 문제지만 한두푼이 아니니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애꿎은 공연을 볼모로 잡은건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그 건물은 대학로의 명물 뮤지컬 센터라기 보다는 화약고, 분쟁지역 정도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한바탕 광풍이 불고, 여튼 뮤지컬은 제때 개막한답니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 그저 객석에 앉아 김광석 노래 맘껏 흥얼거리고 싶을 뿐입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