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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도대체 무슨 말이야?" 도를 넘은 외국어 남용 2

[취재파일] "도대체 무슨 말이야?" 도를 넘은 외국어 남용 2
사실 기사에선 차마 언급하지 못했지만, 이번 논란이 불거지게 된 건 한 패션 전문가가 블로그에 쓴 글 때문이었습니다. 국내 패션 큐레이터 1호로 꼽히는 김홍기 씨의 글( http://blog.daum.net/film-art/13743519)이 SNS를 타고 여러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퍼져간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글의 제목은 '보그병신체에 대한 단상 -우리시대의 패션언어를 찾아서'였습니다. 보그병신체? 처음 들어보셨습니까? 국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 최고 판매량과 유명세를 갖춘 패션잡지 '보그(VOGUE)'에 비속어가 합쳐진 단어인데요, 얼핏 듣기에도 어감이 좋지 않죠. 뉴스에서 더더욱이나 이 단어를 언급하지 못했던 이유는 설명 안 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병신'이라는 단어는 말할 것 없이 속어이고요, 보그를 우리 국어를 오염시키는 대표적 패션지로 내세우는 데 있어서도, 사실 저는 불만입니다. 아무리 최고 판매량이라고 해도 말이죠, 보그가 이 현상의 주범인양 말하는 데엔 무리가 따릅니다.

무엇보다 보그가 '여성 패션지'라는 점이 석연치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학교 때 겪었던 경험을 말씀드리죠.

저는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한 '커피' 마니아였습니다. 하루에 5~6잔 마시기는 기본, 시험기간이나 신경 써 해야 하는 과제가 있는 날엔 10잔도 거뜬히(자랑은 아닙니다. 현재는 많이 줄었어요.) 마시곤 했습니다.

그런 어느날 청천벽력같은 일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 사회에 '된장녀'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명품 가방과 옷, 구두를 밝히고 커피 전문점의 일회용 컵을 들고 다니며 누가 보든 말든 혼자서 저 멀리 뉴욕 배경의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사라 제시커 파커' 역할극을 하는… 이렇게 풀어 설명하니 더더욱 희화화되는 감이 있는데요, 당시 된장녀에 대한 사회의 마녀사냥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돈을 모으고 모아 구입한 명품가방, 식후 카페인이 그리워 사 든 스타벅스 커피 한 잔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멸시 어린 눈길이 꽂히곤 했습니다.

실제 커피를 좋아해 집에서도 내려 마시고 외출할 때는 테이크아웃 커피점을 자주 이용했던 저는 된장녀 논란에 스스로 '희생'됐다고 생각했는데요, 본질인 '커피'를 좋아한대도 어김없이 '된장녀'라는 꼬리표가 붙을까 전전긍긍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도 제 머릿 속에 든 궁금증은 바로 "왜 '된장인(人)'이나 '된장남(男)'이 아닌 '된장녀(女)'일까?" 였습니다. 능력 밖의 비싼 차와 옷에 돈을 쓰는 사치스러운 '남자'도 분명 존재하는데 말이죠.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다니는 건 남자나 여자나 비율로 봐도 분명 비슷했고요.

이번 보그병신체도 저는 불만입니다. '지큐(GQ, 보그만큼이나 대표적인 남성 잡지) 병신체'가 될 순 없었던 걸까요? 왜 허세와 허영을 탓하는 현상엔 어김없이 '여성성'이 강조되는 걸까요. 일상에서 남발하고 있는 외국어 사용 자체를 지적하고 싶었다면 이런 조잡한 조어 대신 다른 방식의 접근도 분명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보그병신체'가 주는 기괴한 어감이 일반적인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결국 '성공적인 개념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인터넷에선 이후 '인문병신체', '전공서적병신체', '광고병신체'같은 신생어가 등장하면서, 외국어 사용 실태를 비판하고 자성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올라왔습니다.

저는 대표적으로 기사를 위해 광고 카피라이터 백승권 씨와 이번 보그병신체를 이슈화한 패션 큐레이터 김홍기 씨를 인터뷰했었는데요, 간략히 내용을 간추려 적어보겠습니다. 두 분의 생각을 읽어보시는 것도 이번 보그병신체에 대한 접근에 큰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이번 취재파일은 마무리 인사를 이렇게 갈음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격적인' 변화까지 아니더라도, 의식적으로 조금씩 필요없는 외국어 사용을 줄여가는 노력을 같이 해 나갔으면 좋겠네요. ^^

<인터뷰1/백승권(광고 카피라이터)>

"광고는 이미 영어로 서양에서 이론이 구체화되어 넘어온 거라서. 아이디어나 크리에이티브 커뮤니티 컨셉 이런 단어들이 고착화된 편이에요. 지금도 세계적인 트렌드를 알기 위해서 외국 자료들을 많아 보고 있고요. 그러다보니까 완전히 번역되지 않은 단어들을 볼 수 밖에 없어요. 거기서 조금만 고민이 되면 충분히 한글로 바꿔 쓸 수 있겠지만요."

"차라리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업계의 사람들끼리는 소통이 돼요. 문제는 클라이언트, 광고주라고 하죠. 그런 분들과 미팅을 하거나 중요한 사업 계획을 나눌 때, 그분들 자체도 또 그 업계에서 쓰는 특정 단어들이 있고요. 거의 한국어, 한국말이기는 한데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그런 식으로. 서로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죠. 저 역시 다른 업계 분들이 쓰는 말을 받아쓰면서도 이상하다, 굳이 저렇게... 차라리 업무 자체가 해외에서 많이 이뤄지는 그런 분들, 그런 분들은 이해가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서 구태여 그걸 따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왜냐면 미디어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좀더 지적이거나 트렌드에 밝거나 전문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그렇게 선동하기도 하고 그 사람들에게 관심이 더 집중되니까 아무래도 그걸 따라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 특징이 막상 들어보면 약간 이상하다? 마치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듯한, 자기가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가 아닌, 다른 사람 말을 따라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는 거죠.

"처음에는 다른 환경에 계셨나 보다, 아니면 해외에서 공부를 하셨거나 생각했는데, 이게 누적이 되면 의도가 보여요. 아, 저분이 말하는 게 전달 자체가 아니라, 자기를 노출하려는, 자기가 이런 단어를 써서 우월성을 보이려고 하는 의도가 있구나, 하고요. 이상하다 굳이 저런 말 쓰지 않아도 되는데, 저걸 대체하는 다른 말을 써도 될텐데.  어떻게 들으실 지 모르겠는데, 전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조금 안쓰럽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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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2/김홍기(패션 큐레이터)

"원인 하나로 환원하기는 어려운 일이긴 해요. 사실 육체적인 장애만 장애가 아니죠. 우리가 우리 모국어를 놔두고 거침없이 외국어를 쓰고 있는 이런 상황들이 어찌보면 정신적인 식민주의라는 생각이 들어요. 패션이라는 건 굉장히 허영, 허세 이런 것들을 쉽게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기도 해요. 그래서 일정 부분 우리 사회가 감안해 주는 부분도 있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문제는 패션에서만 한정되지 않고 일상에서, 다른 형태의 매체들까지도 이런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는 거죠."

"이건 굉장히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사회 전체가 갖고 있는 언어 생활에 대한 반성이 되지 않으면, 보그라는 매거진 하나만 두들겨 팬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이번 글을 쓰고 나서 어떤 분이 지적해 주신 게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내 나라 언어를 안 쓰고 함부로 외국어를 갖다 쓰는데엔 두 가지 심리가 있을 거다. 그 언어를 쓰는 사람이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집단 속에, 계속 그 안에서만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두 번 째는 그런 얼토당토 않는 문체를 씀으로써 지적인 허영심, 내가 이만큼 너보다는 달라! 차별화된 사람이야! 이런 의중을 은연 중에 보여주고 싶은 심리."

"진짜 문제는 패션계만 이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저도 인문학을 가르치고 패션의 역사와 미학, 이런 걸 가르치지만 자칭 인문학을 하는 사람 중에서도 굉장히 심한 사람들이 많아요. 제 글을 읽은 어떤 회사원조차도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보그병신체만 있는 게 아니라 회사병신체도 있다. 자기 부장이 이런 말을 쓴대요.  '오퍼레이션 로스의 퍼시빌리티가 있으니까 리포트해!' 이렇게요. 이게 뭐하자는 짓이에요. '운영상의 손실이 생길 수 있는 부분이 있으니까 점검해보고 보고해' 이렇게 말을 하면 될 거 가지고."

"우리 사회가 언제부턴가 영어로 프리젠테이션하고, 영어로 회의하고, 상담하고. 근데 막상 또 영어로만 하라고 하면 또 잘 못해요. 뭘까요. 반쪽이라고 해야 할까요. 허영심은 있어요, 외국어를 쓰면 뭔가 모국어에 철저한 사람보다 조금 더 우월한 거 같은 환영에 잡혀있어요. 이게 뭐예요. 두개의 언어를 각각 완벽하게 구사해야 훌륭한 거지, 바보처럼 두 개를 섞어 사용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언어라는 건 습관이잖아요. 내가 쓰는 언어가 좀더 정교해지고 섬세해지고 내 나라 말에 대한 고유의 감수성을 다시 찾아야 하지 않나. 결국 우리 모두의 몫이다. 너무 뭉뚱그린 답일 수도 있지만요, 딱히 답이 없어요. 우리 고유의 언어로 우리의 옷을 만들고, 우리의 옷을 설명해 낼 수 있을 때 그게 진짜 문화가 되는 거겠죠. 그게 저의 작은 바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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