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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직권상정 금단 현상' 끙끙 앓는 정치권

[취재파일] '직권상정 금단 현상' 끙끙 앓는 정치권
기억하십니까? 국회 본회의장에서 터지던 수류탄.

'영차 영차' 본회의장 단상을 점령한 야당의원들을 밀어 내기 위해 여당 의원들이 스크럼을 짜고 외치던 소리. 흉하게 벗겨진 안경, 불끈 쥔 주먹. '어딜 만져!' 여자 국회의원의 비명.

더이상 이러지 말자고, 계속 이러면 '안철수' 라는 새 정치에 다같이 밀려난다고, 지난 18대 국회에서 여야가 함께 만든 법안이 일명 '국회선진화법'입니다. 이런 법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 국회법을 개정한 것이지요. 몸싸움의 근본 원인인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을 축소시킨 법입니다.

예전 국회법에는 국회의장이 국회교섭단체 대표와 협의해서 안건에 대한 심사기일 지정을 할 수 있고, 그 기간까지 상임위가 심사를 마치지 못하면 의장이 안건을 바로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었습니다. 국회의장은 여야를 아우르는 그야말로 국회의장이어야 마땅하지만, 관례상 여당에서 국회의장을 배출하다보니, 정부와 여당이 하고자 하는 법이 야당의 반대로 막혀 있을 때는 팔이 안으로 굽을 수 밖에 없는 국회의장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해 준 것입니다. 여야 원내대표와 협의를 거치도록 했지만, 협의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합법적으로 직권상정을 하게 되면, 야당은 단상을 점거하게 되고, 여당은 합법적인 입법절차라고 주장하며 또 알력으로 야당을 물리치고 방망이를 내리치는 일을 반복해 왔던 겁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예 국회의장이 의지로 직권상정을 결정하는 일을 최소화 하도록 조건을 단 것이 개정된 국회법입니다. 1. 천재지변의 경우 2. 전시.사변 등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의 경우 3. 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와 합의하는 경우.  이 세 가지 경우에만 과거처럼 심사기일을 지정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여당이 야당과 협상하다 골치 아프다 싶으면 꺼내 들었던 '직권상정'이 사실상 사라지게 된 겁니다. 교섭단체와 협의에서 '합의'로 법 조항이 바뀌다 보니, 야당이 반대한 안을 직권상정하자고 합의할리도 만무하고요.

요즘 그래서 새누리당은 끙끙 앓고 있습니다. 정부조직개편안을 통과는 시켜야 겠는데, 옛날 방식으로는 도저히 안되고, 새로운 방식은 모르겠고,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와대에서는 여당이 뭐하는 거냐고 불만을 터뜨리니, 이한구 원내대표를 비롯한 원내지도부는 속앓이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다, 당 내부 일각에서는 이 모든 게 '잘못된 선진화법을 만든 지난 원내지도부' 탓이라며 현재 당대표를 맡고 있는 황우여 전 원내대표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습니다. 밖에서 일하다 일이 너무 안풀리고 남들이 눈총을 주니, 이제 집안에서 엄마탓 아빠탓을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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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여 대표는 '있는 듯 없는 듯'한 특유의 리더십으로 당을 이끌어 왔는데,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불만을 계기로 황 대표의 리더십을 비난하고 흔드는 여론이 당내에서 생겨 곤혹스런 상황입니다. 어제 열린 의원총회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은 쌓여왔던 불만들을 터뜨렸습니다. 국회선진화법을 고쳐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당 대표 책임론도 나오고, 정부조직법 협상에서 여당이 청와대에만 주파수를 맞춰 스스로 여당의 입지를 잃었다는 이야기까지. 정부조직법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 당내 결속을 위해 모였던 의원총회 자리가 내부의 불만과 갈등을 표출하는 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새누리당은 그동안 너무 조용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당이 총력을 기울였고, 국회의원 한명 한명의 목소리는 대선 승리라는 목표 아래 묻혀있었습니다. 19대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입성한지 1년이 다 돼 가지만, 제 역할을 한 의원이 얼마나 될까, 회의적입니다. 이런 가운데 의원총회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고 하니, 그 내용을 떠나 우선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국회선진화법이 식물국회를 만드는 걸 넘어 식물정부를 만들었다고 여당 의원들은 토로하지만, 이 법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봐 왔던 국회 회의장 점거와 밤샘, 몸싸움이 사라진 것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최근 몇년간 여당의 직권상정과 야당의 의장석 점거는 어떤 사안의 절실함에서 나오는 충돌이라기 보다는 서로의 지지층에게 보여주기 위한 통과의례 같았습니다. 여당이 밀어 붙이면 야당은 저항하다 밀리거나, 또는 단상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플래카드를 들며 '우리는 끝까지 반대했다'는 기록물을 남기는 행위.그런 행위들이 사라진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당은 '직권상정' 없이 어떻게 살란 말이냐!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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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출범을 위한 '정부조직개편안'이 직권상정의 수순을 밟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개정된 국회법의 효과는 확실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정치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국회에 들어온 국회의원들이 바뀌어야 합니다. 직권상정이 있던 시절에 야당은 끝까지 반대하면서 명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승리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종국에는 무참히 국회의장에서 밟히는 모습이 여당의 독단적인 운영을 부각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그런 피해자의 모습, 저항의 모습을 보여줄 직권상정이라는 '무대'는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야당도 이제는 주고 받으며 협상하는 것에 더 주력해야 합니다.

여당도 마찬가집니다. 이제는 야당을 설득하지 않으면,  법안은 통과시킬 '무기'가 사라졌습니다. 야당을 단지 반대하기 위한 다른 당으로 보지 말고 다른 의견을 가진 절반의 국민으로 봐야합니다. 그런 진정성을 가지고 야당과 협상에 나서야만 '합의안'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또 과거에는 직권상정을 하면서 야당의 불법적 단상점거와 폭력을 문제 삼으며 야당을 깎아 내리는 여론전을 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기회가 아무리 기다려도 없습니다. 오히려, 정치인이라면 응당 있으리라 기대했던 '정치력'이 없음을 국민들이 간파하고 실망할 뿐입니다.

'직권상정'을 끊고 난 19대 국회는 여야 모두 '컨디션'이 안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몸이 아니라 말로, 억지가 아니라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해 내는 멋진 정치인이 탄생하고 박수 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됐습니다. 이제 여야 국회의원들이 환골탈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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