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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조선에도 '콘클라베' 있었다

[취재파일] 조선에도 '콘클라베' 있었다
3월 12일부터 새로운 교황을 뽑는 추기경들의 비밀 투표가 시작된다.

전 세계에서 모인 80세 이하의 추기경들이 외부와는 완전히 격리된 상태에서 그들만의 비밀 투표를 한다.

이 투표는 2/3 이상의 지지를 얻은 사람이 나올 때까지 반복한다.

콘클라베라고 하는 이 교황 선출 투표는 입후보자가 없고 유세가 없고 토론이 없는 독특한 제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콘클라베가 있었다면 믿을지! 그것도 조선시대에 말이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인 1890년으로 되돌아간다.

여기에서 간단히 한국 카톨릭 역사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외부의 선교가 아니라 자생적으로 신앙의 뿌리를 내린 한국 카톨릭 교회가 창립된 것은 1784년이다.

그리고 1831년에 바티칸 교황청으로부터  조선교구로 설정된다.

이후 지속적인 박해와 끔찍한 탄압 속에서 끊임없이 순교의 피를 뿌리면서도 한국의 카톨릭은 신앙의 뿌리를 이어간다.

이 시기 한국 카톨릭 교회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 단체가 있으니 바로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다.

교황청은 1831년에 조선교구를 설정하면서 한국 선교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한다.

이 결정에 따라 1836년에 모방 신부가 조선에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이 단체는 한국 천주교회의 선교를 총책임진다.

그래서 1942년에 노기남 주교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지금의 서울 교구장에 해당하는 경성교구장을 맡을 때까지 조선 교구장들은 모두 이 단체에서 파송된 프랑스 선교사들이다.

조선 교구장은 현직 교구장이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고 교황청이 이를 추인하는 방식으로 선출됐다.

이런 방식은 7대 교구장인 블랑 주교까지 적용됐다.

그런데 8대 조선 교구장 선출에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조선 교구에 파견돼 23년간 활동해온 블랑 주교가 1890년 2월에 급작스럽게 사망한 것이다.

당시 46살이었던 블랑 주교는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지도 못한 채 급서했다.

후계자 지명 없는 급작스러운 교구장의 선종.

파리 외방전교회는 이럴 때를 대비한 규정을 갖추고 있었다.

"교황이 이미 지명한 보좌주교(후계자)가 없는 상태에서 선교지역의 장상이 사망하는 경우 투표권이 있는 모든 선교사들은 선교지역을 가장 잘 관할할 수 있다는 생각하는 3명의 이름을 적되,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을 1순위에 적어 완전히 밀봉해 개별적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내야 한다"

투표권은 선교 현지에 파송된 지 3년이 지난 사람만에게만 주어졌다.

피선거권은 명시돼있진 않지만 해당 선교지역에 파송된 선교사 적임자를 대상으로 했다.

투표방법은 3명의 이름을 적되 그 순위를 적도록 했다.

총득표보다는 1순위 득표를 한 사람을 우선 지명하겠다는 뜻이다.

투표지 전달 방법이 흥미롭다.

"완전히 밀봉해" "개별적으로" 본부에 보내도록 하다.

자신들의 대표를 최대한 비밀을 유지하면서 토론이나 유세 없이 뽑도록 한 것이다.

어쩐지 콘클라베의 냄새가 나지 않는가? 파리 외방 전교회가 교황 선거를 본떠 선교지역 교구장을 뽑을 수 있는 규정을 만든 것이 아닐까.

당시 조선교구 소속 선교사는 모두 12명이었다.

그 중 11명은 조선에서 활동 중이었고 1877년부터 8년 동안 조선에 파견됐던 뮈텔 신부는 조선교구 소속을 유지한 채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파견돼 신학교 교수로 근무 중이었다.

이 때문에 뮈텔 신부는 피선거권은 있었지만 근무 지역이 조선이 아니라는 이유로 투표권은 없었다.

조선 교구에 파송된 12명의 신부들이 자신들의 장상이자 조선교구장을 자신들의 투표로 뽑는 것이다.

교황은 원칙적으로 세례를 받은 남성 신자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밀실 안에 들어가 있는 추기경 가운데 한 명이 된다.

자신들의 대표를 자신들의 손으로 뽑는다는 점에서 1890년 조선 교구장 투표는 콘클라베와 퍽 유사하다.

조선 정부가 서구열강들과 잇따라 수교하면서 묵인하는 분위기로 돌아서곤 있긴 했지만 당시 카톨릭은 여전히 국가에서 금하는 사교 집단이었다.  선교사들이 모임을 갖고 누가 차기 교구장으로 적당한지를 토론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차기 조선 교구장이자 자신들의 대표인 동시에 지도자로 누가 적합한지를 신께서 알려주시길 바라며 기도하고 묵상했을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밀실에서 투표 이외에는 묵상과 기도로 보낸다는 추기경들처럼 말이다.

당시 조선의 선교사들인 시스티나 성당의 밀실 못지않은 조선이라는 밀실에 갇힌 상태였다.

- 그런데 여기서 발칙한 상상 한 가지. 누군가는 자기가 되어야 한다고 보이지 않게 유세를 하고 다니지는 않았을까? 저 사람은 이런 흠이 있다지라며 은근히 유력한 경쟁자에 대한 흑색선전을 늘어놓고 다니지는 않았을까?

시스티나 성당에 모인 추기경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현재까지 공개된 '조선 콘클라베'에는 그런 흔적이 없다.

우선 내가 적임이라며 자신을 이름을 적어낸 이가 없다.

3순위 투표까지 하도록 한 제도를 악용한 '전략적인 투표'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순위와 함께 보낸 추천 이유를 보면 당시 상황에서 누가 가장 적합한 교구장인지를 고민하고 기도한 흔적이 역력하다.

'조선 콘클라베'는 당시 파리 신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뮈텔 신부를 차기 조선 교구장으로 선출했다.뮈텔 신부는 11명의 투표자 가운데 7명으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다.

1,2,3 순위 득표를 더한 총득표에서는 코스트 신부가 10표를 받아 뮈텔 신부를 앞섰지만 1순위 득표자 우선 원칙에 따라 뮈텔 신부가 당선된 것이다.

참고로 코스트 신부도 뮈텔 신부를 1순위를 지명했다.

이후 교황청의 추인을 받아 조선의 8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뮈텔 주교는  1933년까지 43년간 조선교구장, 서울 교구장 등으로 한국천주교회를 이끌게 된다.

'조선의 콘클라베'는 이 때가 단 한 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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