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한국 시간 기준 7일) 미국 워싱턴 D.C. 일원에는 3월에는 보기 드문 눈폭풍 비상이 걸렸습니다. 모든 정부 기관과 학교 그리고 적지 않은 상가들이 문을 닫았고, 직장인들 상당수가 아예 출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존 브레넌 신임 CIA 국장 지명자에 대한 상원 인준 투표가 진행됐습니다. 눈폭풍에도 불구하고 100명의 상원의원 가운데 94명이 참석했고 근래 보기 드문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공화당의 랜드 폴 의원이 연단에 오른 것은 오전 11시 47분, 그가 브레넌 지명에 반대한다는 것은 명확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연설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의 연설이 끝난 것은 다음 날 새벽 0시 40분, 무려 12시간 53분동안이나 연단을 내려 오지 않은 것입니다. 해리 리드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만류했지만 소용 없었습니다. 화장실도 가지 않고 보좌진이 전달해 준 물과 간단한 음식물을 먹으면서 그는 쉼없이 브레넌 지명자에 반대하는 이유를 설파했습니다. 이유는 오바마 행정부의 무인기 정책에 반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브레넌 지명자의 인준 표결은 다음으로 미뤄졌습니다.
'필리버스터(Filibuster), 우리 말로는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로 해석되고 스페인어로 해적 또는 약탈자를 의미하는 '필리부스테로(Filibustero)'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었던 카토가 시저의 독재에 반대하기 위해 장시간 연설을 한 것이 최초의 '필리버스터'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진국 의회 대부분이 법으로 이 필리버스터 제도를 운영하지는 않지만 발언시간 제한 규정을 두지 않음으로써 필리버스터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무제한 토론제'라는 명칭으로 필리버스터 제도를 도입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필리버스터'는 다수파가 숫자로 소수파를 억압하는 것을 막기 위해 꼭 필요한 제도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에 지금은 미국의 상원에서만 가끔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미국 최초의 필리버스터는 1841년 민주당 상원의원들이 은행법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차례로 장시간 연설에 나선 것이 꼽히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최장시간 필리버스터 기록은 스톰 서몬드 전 상원의원이 1957년 세운 24시간 18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발언시간 제한 제도가 없었던 지난 1964년 당시 김대중 의원이 김준연 의원 구속동의안을 저지하기 위해5시간 19분 동안 쉬지 않고 연설을 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다음 7대 국회에서 의사진행 발언을 30분으로 제한하는 국회법 개정이 이뤄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필리버스터'에 대해 소수자의 주장을 보호하기 위한 유용한 제도라는 인식이 아직 강하기는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때문에 이번 경우처럼 10시간이 넘는 장시간 필리버스터는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필리버스터' 남용을 막기 위해 연설을 중단할 수 있게 하는 '클로처'라는 보완제도도 두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필리버스터'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미국 의회에는 우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날치기'와 '몸싸움' '단상 점거'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아무리 길고 지루해도 법에 정해진 절차는 철저히 지키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1964년 통과된 미국의 시민 인권법안을 둘러싸고는 무려 57일동안이나 필리버스터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번 폴 의원의 필리버스터를 둘러싸고도 내용에 논란은 있지만 그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여야도 언론도 특별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습니다. 눈폭풍을 뚫고 와서 하루를 꼬박 허비한 동료 의원들도 별 말이 없습니다. 이른바 '법대로' 였기 때문입니다.
[취재파일] 눈폭풍 속 '필리버스터', 장장 13시간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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