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선행학습이 왕도?…수학 접근법을 바꿔야

[취재파일] 선행학습이 왕도?…수학 접근법을 바꿔야
“아들 녀석의 시험 문제지를 보니 중학교 1학년 수학인데도 도대체 내가 손을 댈 수가 없어요. 너무 어려워.” 얼마 전 만난 교육계 인사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시험이 어려운데다 아직 배우지도 않은 공식을 활용한 문제까지 나와서, 학원에서 수학 선행학습을 하지 않으면 점수가 엉망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정말 그럴까? 현직 수학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시험문제가 어렵기로 유명한 서울 강남. 서초지역 중학교들의 지난해 중간.기말고사 수학 문제들을 분석해봤습니다. 서초구 A 중학교의 경우,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24문제 가운데 8문제가 1학년에서 배우지 않은 상위개념을 묻는 문제로 나타났습니다. 전체 문항의 1/3이 선행학습 없이는 풀기 어려운 문제로 채워진 겁니다. 서초구 B 중학교에서도 20% 이상이 선행학습이 필요한 문항이었습니다. 강남구 중학교들은 오히려 상위개념이 필요한 문제를 거의 출제하지 않았는데, 이미 선행학습 유발 문제들로 엄중하게 경고를 받은 적이 있어서 지난 해에는 자중한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저희 취재가 시작되자 서울시교육청에선 지난 해 2학기에는 “선행학습 유발 시험문제”를 출제한 곳이 고등학교 단 한 곳 밖에 없었다며 보도자료를 냈는데, 취재진이 분석한 5개 중학교 2학기 시험지에선 고교 과정의 개념.공식이 필요한 문제들이 여전히 1-2문제씩 튀어나왔습니다.

이렇게 일선 학교의 중간.기말고사에 선행학습이 필요한 문제들이 출제되다보니, 학생들은 너도나도 내신 관리를 위해서라도 선행학습 학원으로 몰리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선행학습을 한다고 해서 모든 학생들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걸까요?

선행학습을 한 학생들이 얼마나 학습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지 간단한 테스트를 해봤습니다. 중학교 3학년 과정을 이미 공부했다는 중2 학생들에게 3학년 제일 첫 단원에 나오는 제곱근, 즉 루트에 대한 문제를 풀게 했습니다.
이미지

1번 문제는 단순한 계산 문제이고, 2번 문제는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1번에 적용되는 루트의 개념을 묻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정답률은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단순히 계산만 하면 되는 1번 문제는 70%가 맞혔지만, 2번 문제는 70%가 틀렸습니다. 전문가들은 학생들이 눈에 익숙한 유형의 문제는 기계적으로 풀고 있지만, 개념에 대해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선행학습을 한다고 해도,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공부하는 학생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얘기입니다.

학교 시험에 나오기 때문에, 수능 시험을 대비해 여러 문제집을 풀어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빨리 진도를 빼는 선행학습에 매달리고 있지만, 모든 학생들에게 선행학습이 효과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은 개념이나 원리에 대한 이해는 뒷전인 채 “문제유형 외우기”로 수학교육이 왜곡되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원리나 개념을 학생들에게 충분히 설명해서 이해시키는 대신 수능 시험에 필요한 1만3천개 유형을 외우게 하는 방식의 지도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더욱이 최근 수능 시험이 EBS 교재와 연계돼 출제되다 보니, “문제 유형 외우기”는 학원 뿐 아니라 고3 교실에서도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취재 도중 만난 많은 초등학생, 중학생들은 수학은 암기과목이라 느끼고 있었습니다.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공식을 달달 외우고, 새로운 숫자를 대입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과연 수학을 암기과목처럼 공부해도 되는 걸까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수학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있는 최승현 연구위원은 “개념을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과 다양한 문제를 많이 풀어봐서 빨리 문제를 푸는 능력은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학생들이 수학에 대해 잘못 접근하고 있다는 겁니다.

정부도 이런 문제를 모르지 않습니다. 아니, 심각하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국제평가에서는 우리나라가 좋은 성적을 거두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생들의 흥미는 떨어지고, 대학에서 수학은 기초학문으로서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수학과학교육팀’ 이라는 전담 부서를 새로 만들어 왜곡된 수학 교육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첫 단추는 수학 교과서 개정입니다.

올해부터 배포되는 초등 1-2학년 수학 교과서는 옛날 이야기와 노래 등으로 재밌게 꾸며졌습니다. 이른바 “스토리텔링식 수학 교과서”입니다. 접근방법만 바꿨을 뿐인데, 어린 학생들은 “왜 빨리 태어나서 이런 교과서로 공부할 기회를 놓쳤을까”라고 말할 정도로 새 교과서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딱딱한 교과서와 비교했을 때, 훨씬 더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습니다. 귀여운 초등학생들이 “언제 우리는 새로운 수학 교과서로 공부하게 되느냐”며 해맑게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들이 고학년이 되어서 수학에 염증을 느끼지 않도록 우리 수학교육의 방향과 방식을 빨리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