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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버마 민주화의 어머니, 아웅산 수치

[취재파일] 버마 민주화의 어머니, 아웅산 수치
민주화 운동의 꽃, 버마(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어머니라 불리는 아웅산 수치 여사. 최근 그녀의 첫 한국 방문이 이뤄졌습니다. 처음 이 소식이 들렸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들은 바로 한국에 머물고 있는 미얀마 망명가들입니다. 저는 그 가운데 아웅산 수치 여사가 대표로 있는 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즉 버마(미얀마) 민족민주동맹의 한국지부 사람들을 만나봤습니다. 그들을 통해 아웅산 수치 여사가 어떤 사람인지 그려보자는 의도였습니다. 짧은 제작 기간에 정신없이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수치 여사의 방한이 끝난 지금. 그동안 취재한 아웅산 수치 여사의 이야기 일부를 정리해보려 합니다.

 ( 덧 - 버마의 국명은 1989년 군사정권에 의해 '미얀마'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웅산 수치 여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국명을 바꾼 것에 불법성이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존중해 버마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

아웅산 수치 여사는 버마의 독립을 일구어낸 아웅산 장군의 딸입니다. 이는 이름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웅산'이라는 아버지 이름을 앞에 쓰고, 할머니 '도 수'(Daw Suu)와 어머니 '도 킨지'(Daw Khin Kyi)에서 한 글자씩을 가져와 아웅산 수 치라는 이름을 만든 거지요. 수치 여사는 아버지의 후광을 꽤 많이 받아 이미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지만 지도자의 이미지보다는 그저 아웅산 장군의 딸 정도로만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아버지 아웅산 장군은 그녀의 나이 두 살에 저격됐고, 여사는 어머니를 따라 해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5살 때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 1962년에는 독재자 네윈 장군에 맞서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지난 1988년, 위독한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영국에서 급히 미얀마로 돌아오게 되면서 그녀의 삶, 그리고 버마의 역사는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당시 촉발된 민주화 운동에 수치여사가 몸을 바치게 된 겁니다.

- NLD 한국지부 내툰나잉 회장
"(수치 여사님은) 조국에서 자신을 필요해서 부르면 어떤 역할을 하려고 계속 준비해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 여사님 옆에 있던 사람들이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하니까 바로 나선 거죠. 첫 번째 연설 때 25만 명 정도 버마 사람들이 모였어요. 저도 그 때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수치 여사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직접 본 적도 없었고, 연설도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저 아웅산 장군님의 딸 정도로만 알았죠. 해외 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버마어를 완벽히 구사했고, 연설의 내용도 완벽했습니다. 그때부터 버마 국민들이 또 학생들이 아웅산 수치 여사님을 우리의 지도자라고 처음 인정하게 됐죠. 민주화의 지도자를 처음 만난 날이었습니다."

1988년 9월 그녀는 버마의 야당이자 민주화 세력이라 불리는 NLD를 결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군부는 수치 여사에게 내란 음모죄를 적용해 1989년 이후 가택 연금 조치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NLD의 영향력은 커졌고, 이듬해 총선에서 NLD는 압승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군부는 정권이양을 거부하고 민주인사들을 잡아들였습니다. 물론 아웅산 수치여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수치여사는 21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가택연금 조치를 당했습니다. 그 기간은 15년이 넘습니다.

- 국제민주연대 최미경 사무국장
"모든 일신의 자유뿐만이 아니고 공개적인 정치적인 활동, 사회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집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택연금) 초반에는 단식도 시도를 하셨어요. 그런데 단식 시도할 때 대부분 밖에서 말렸습니다. 굉장히 위험하다고요. 살아계신 상태로 계속 활동을 하셨으면 좋겠다고 했죠."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박은홍 교수
"가택연금 상태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버마의 인권이나 평화를 위한 어떤 그런 목소리를 내고 또 그것이 국제사회의 어떤 지지를 얻어내고 그래서 비록 집안에 이렇게 활동이 제한 돼 있었지마는 그녀의 투쟁은 그런 구속된 제한된 상황 속에서도 지속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가택연금이 풀리면 수치 여사는 기다렸다는 듯 대외 활동을 해나갔습니다. 지방 연설은 물론이고, 매주 집 앞에서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집회를 가졌습니다. 여사는 그 집회에서 사람들에게 민주화의 꿈을 심어주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사이에도 시련은 계속됐습니다.

- NLD 한국지부 내툰나잉 회장
“수치 여사님이 어떤 지역에 가더라도 국민들이 5만 명, 10만 명, 50만 명 그렇게 다 모였어요. 그렇게 여사님 연설 듣기위해서 모이니까 군사정부가 크게 걱정했죠. 그러다가 2003년 5월 달엔 수치여사님을 암살하려고까지 했습니다.”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박은홍 교수
“2003년 5월 30일 아웅산 수치 대표가 가택연금에서 이제 풀려나면서 또 역시 전국을 순회하면서 정치적 행보를 하고 있었는데 데파윈라는 지역에서 군부와 유착 돼 있는 세력들의 소위 피습을 당한 거죠. 그래서 그때 당시 버마 망명 정부의 보고에 따르면 현장에서 70명가량이 사망하고 200명가량이 부상을 당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실종 됐다, 물론 이제 아웅산 수치의 지지자들이고 민족민주동맹의 당원들이었던 거죠. 다행히도 아웅산 수치는 피신을 할 수 있었고, 이 사건을 두고 이른바 ‘데파윈학살사건’이라고 합니다. 그 직후에 국제사회가 한 목소리로 군사정부를 엄청나게 이제 비난을 했는데 근데 굉장히 참 웃지 못 할 얘기는 뭐냐 하면은 오히려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군사정부는 오히려 이 사건이 아웅산 수치 지지자들에 의해서 도발 된 사건이다 그래서 오히려 아웅산 수치를 감금하고 또 아웅산 수치 지지자들을 구속하는 그런 어떤 사태가 또 벌어졌던 것입니다.”

지난 2010년 11월 13일. 미얀마 정부는 드디어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한 가택연금을 풀어줍니다. 숱한 고난의 세월. 아웅산 수치 여사가 끝까지 고수하고 있는 한 가지는 '비폭력 저항'입니다. 심지어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뒤에도 그녀는 군부에 대한 미움이나 증오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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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웅산 수치 / 샌프란시스코 프리덤 포럼 2012 中
“우리는 사람들을 탄압으로부터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두려움과 증오로부터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중략) 만약 우리가 자유로 가는 길을 증오와 폭력에 대한 본능으로 가득한 채로 나아간다면, 끝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닌 또 다른 형태의 감옥일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증오라는 감정을 가지고 지은 감옥 말이죠.”

“저에게 자유란 양심과 평화적으로 살 수 있는 권리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자유를 빼앗겼더라도 얌심과 평화적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저를 자유롭게 만들고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양심과 평화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후 수치 여사는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여 놓게 됩니다. 이 사실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충격이기도 했습니다. NLD가 압승한 1990년 총선 결과를 지키라던 기존의 주장을 더 이상 하지 않고, 군부가 만든 현 미얀마 정부의 상황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국제민주연대 최미경 사무국장
"(현재의) 아웅산 수치 여사 역할은 아무래도 버마 전체를 아우르는 역할이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나 영적지도자나 보다는 정치지도자로서의 역할이 당분간 필요하고 아직까지 갈 길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 한 단계 한 단계를 밟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지금 버마에서는 아웅산 수치 여사로 집중되는 거지요."

어떤 시대적 요구가 그녀에게 주어졌고 그녀는 그 요구대로 제도권 정치의 길에 나아간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재야에서 나온 그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을 겁니다.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박은홍 교수
“지난해 4월 1일 보궐선거에서 민족민주동맹은 45개 의석 중에 43개를 얻었습니다. 근데 전체 의석수에서 보면 7%에도 달하지 못하는 의석수 입니다. (현재 미얀마 헌법에 따르면) 전체 의석의 25%를 당연히 군부가 지명하는 군부 대표들로 이렇게 구성 되도록 돼 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선출 방식도 간선제고 그리고 군 통수권자가 주요 장관들을 임명하도록 돼 있고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군은 그들의 민주주의 우리가 그들이 지향해야할 민주주의를 규율 민주주의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때의 규율이라는 거는 군의 지도를 얘기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2008년 헌법은 민족민주동맹이나 또는 다른 인권단체들 또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보기에는 비민주 요소가 굉장히 많은 그런 어떤 헌법으로 이제 볼 수가 있죠. 따라서 2015년에 총선이 있게 되는데 이 총선에서 총선에 앞서서 과연 이 헌법이 개정될 수 있을까, 헌법이 개정 되려면 75%의 의석 전체 의석의 75%가 필요하게 되는데 굉장히 힘든 상황인 거죠.”

버마와 함께한 수치여사의 과거는 힘들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고난의 여정이었습니다. 지금부터 다가올 미래는 사실 더한 고난의 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길에선 수치 여사의 모습은 언제나 의연합니다. 그 모습에 많은 버마 사람들이 그토록 눈물을 흘렸었나 봅니다.

- 아웅산 수치 / 샌프란시스코 프리덤 포럼 2012 中
“제가 언제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버마의 혁명은 영혼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사회를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군사정권을 문민정치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령을 하는 독재자가 필요 없고 독재자를 허락하지 않는 사회를 유지시킬 수 있도록 우리 자신들을 바꿔야 합니다. (중략)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 대한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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