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됐건 박 당선인이 김 위원장을 지명함에 따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제도 도입 이후 인수위원장이 곧바로 초대 국무총리로 자리를 옮기는 첫 사례로 기록되게 됐다. 박 당선인이 김용준 총리 후보자 지명으로 보여준 메시지는 '법치와 약자보호'로 요약할 수 있다.
처음 나온 이야기는 아니지만 정권 말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 비리가 터져나오면서 지난 대선을 앞두고 또 다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도마에 올랐다. 권력분산 필요성이 제기됐고 부통령제, 책임총리제 등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이번 초대 총리 인선에 대한 관심이 컸던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인선 내용은 책임총리·권력분산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지적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박근혜 당선인이 후보시절, 직접 '책임총리제'를 언급했던 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된다. 박 당선인은 지난해 11월 정치쇄신안 발표 때 "국무총리에게 헌법과 법률에 따른 실질적 권한을 부여하고 현재 사문화되어 있는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을 보장하겠다"고 밝혔을 뿐이다.
◈ 총리의 권한, '있다?'·'없다?'
국무총리의 권한은 헌법에 잘 규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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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조
①국무총리·국무위원 또는 정부위원은 국회나 그 위원회에 출석하여 국정처리상황을 보고하거나 의견을 진술하고 질문에 응답할 수 있다.
②국회나 그 위원회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국무총리·국무위원 또는 정부위원은 출석·답변하여야 하며,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이 출석요구를 받은 때에는 국무위원 또는 정부위원으로 하여금 출석·답변하게 할 수 있다.
제86조
①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②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
제87조
①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②국무위원은 국정에 관하여 대통령을 보좌하며, 국무회의의 구성원으로서 국정을 심의한다.
③국무총리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
제88조
③대통령은 국무회의의 의장이 되고, 국무총리는 부의장이 된다.
제89조
다음 사항은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17. 기타 대통령·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이 제출한 사항
제94조
행정각부의 장은 국무위원 중에서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제95조
국무총리 또는 행정각부의 장은 소관사무에 관하여 법률이나 대통령령의 위임 또는 직권으로 총리령 또는 부령을 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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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조항들에서 볼 수 있듯이 국무총리는 국무위원과 행정각부의 장에 대한 제청권을 갖고 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국무총리의 제청없이는 이들을 임명할 수 없다. 또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하고 국회에 출석해 의견을 진술할 수도 있다.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중요한 정책을 심의하는 국무회의의 부의장이기도 하다.
헌법은 국정의 기본계획과 정부의 일반정책을 비롯해 17가지 사안에 대해 반드시 국무회의의 심의를 반드시 거치도록 별도 조항(89조)까지 만들어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국무총리는 흔히 말하는대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인 셈이다.
◈ 대독·방탄 총리일 수밖에 없는 이유
하지만 국무총리의 이런 법적 권한을 꼼꼼히 따져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속된 말로 명패만 빛났지 실속이 없다. 조항별로 따져보자. 먼저 62조. 내각제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이 국회 출석권과 발언권 조항은 '권리'라기보다 사실은 '짐'에 가깝다. 대독(代讀) 총리, 방탄(防彈) 총리로 불리게 된 것도 이 조항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지금까지 이 조항을 근거로 자신을 견제하는 기관인 국회 관련 업무를 총리에게 떠넘겨온 대통령들이 적지 않았다.
총리의 대표적 권한 중 하나인 86조도 마찬가지다. 국무총리는 행정각부를 통할한다고 돼 있지만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명을 받아서'다. 법조문만 놓고보면 자칫 대통령의 의중을 묻지 않고 일처리를 했다가는 월권이 될 수도 있다. 또 전체적인 역할도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으로 명문화돼 있다.
87조의 국무위원 제청권도 사실 재량권으로 보기 어렵다. 헌법상 국무총리가 소신껏 국무위원이나 장관 후보자를 제청을 할 수는 있겠지만 임명권자가 거부할 게 뻔한 사람을 제청할리 없다. 결국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의중을 살펴 그 가운데서 '재량껏' 제청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국무위원 해임건의권은 국무총리가 휘하 국무위원들을 향해 휘두를 수 있는 '칼'이다. 하지만 '보좌'가 본질인 국무총리 입장에서는 그렇게 내쳐야할 국무위원이나 장관이 있하더라도 먼저 임명권자와 상의하는 게 순리다. 대통령의 의사에 반해 해임건의권을 쓸 수도 있겠지만 이는 국무총리 본인의 직을 걸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 설사 직을 걸고 그렇게 했다 해도 대통령에게 해임을 강제할 권한은 없다. 막말로 대통령이 이를 무시하면 그만이다. 건의는 어디까지나 건의일 뿐이다. 이 조항은 오히려 대통령이 누군가를 직접 내치기 힘들 때 이른바 '차도살인'(借刀殺人) 형식으로 사용하기 딱 알맞다. 해당 조항을 만든 의도가 그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현실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89조의 '국무회의'는 어떨까? 보기에는 국정의 기본 계획부터 일반 정책, 군사 중요 사항, 사면 등 대통령의 거의 모든 권한이 국무회의를 거쳐야 행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일종의 견제장치처럼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국무회의는 어디까지나 '심의'기구라는 점이다.
통상 신문이나 방송에서 "정부는 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에 대해 심의.의결했다"라고 쓰지만 이는 관행적 표현일 뿐 국무회의에 '의결권'은 없다. 얼마전 이명박 대통령이 택시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을 때도 국무회의 심의를 거치긴 했지만 실제 법적 효력은 대통령이 서명하는 시점에 발효됐다.
◈ 대통령의, 대통령에 의한, 대통령을 위한 '총리'
우리 나라 헌법의 특징은 내각제적인 요소가 가미돼 있다는 점이다. 마치 이 때문에 헌법대로만 하면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권력 분점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정치인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정체(政體)는 어디까지나 대통령제다. 일부 학자들은 우리나라 헌법이 정말 '대통령 하기 좋게' 설계돼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 제왕적 대통령제를 견제하기란 불가능한 것인가? 물론 아니다. 우리 나라에는 엄연히 '3권 분립'의 원칙이 존재한다. 입법부와 사법부가 제 역할을 하면 대통령의 전횡은 불가능해진다. 특히 입법부의 역할이 중요한데 사실 우리 나라에서 입법부, 즉 국회가 도와주지 않으면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참여정부 시절을 생각하면 참고가 될 듯하다.)
총리는 어디까지나 총리다. 대통령의 원활한 업무수행을 돕는 자리다. 따라서 애초에 '책임총리' 운운하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 법 제도와는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김종필 총리를 '책임총리', 혹은 '실세총리'라고 하지만 당시 김종필 총리는 정권창출을 함께한 공동정부의 한 축으로 보는 게 맞다.
사실 대통령이 행정부의 모든 권한과 책임을 갖는 대통령제에서 총리가 주도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가 있다. 실제로 주권자인 국민도 정부의 공과를 대통령에게 묻지, 총리에게 묻지는 않는다. (또 다른 책임총리의 사례로 꼽히는 이해찬 총리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다만 대통령이 행정각부의 장에게 혹은 총리에게 적절하게 임무와 권한을 부여해 일을 시키는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임무에 따른 권한의 부여이지 정치권에서 말하는 권력분점은 아니다. 대통령제 하에서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대통령의 몫이다. 바로 이것이 임기말 대통령이 칭송받기 어려운 이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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