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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나이 80의 청년' 고은 시인

고은 시인과 인터뷰

[취재파일] '나이 80의 청년' 고은 시인
감색 재킷에 체크무늬 바지, 각이 잘 잡힌 중절모와 내리쬐는 햇빛까지 반사할 정도로 잘 닦인 검정 구두를 신은 노신사. 한국 나이로 여든 하나. 기자간담회장에 들어온 고은 시인을 만난 첫 느낌은 ‘멋쟁이’였습니다. 자리에 앉아 신간 출간 소회를 밝히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으면서, 외면에 풍기는 멋은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의 생각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일상적인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요즘 말하는 ‘뼛속까지 시인이구나’ 싶었습니다.

고은 시인은 2013년 1월, 두 권의 책을 새로 선보였습니다. ‘두 세기의 달빛’이라는 대담집과 ‘바람의 사상’이라는 1970년대 일기입니다.

‘두 세기의 달빛’은 고은 시인의 문학적 사상사를 담고 있는 일종의 ‘자서전’입니다. 한 때 나라와 나랏말을 잃은 소년이 해방과 전쟁, 정치 격동기를 겪으며, 시를 시작하게 되는 과정이 담겼습니다. 20세기에서 시작해 21세기로 이어지는 삶, 두 세기에 걸쳐서 살고 있다는 시인은, 직접적인 ‘햇빛’보다는 조금은 분명하지 않고 명암이 섞여있는 ‘달빛’ 같은 깨달음을 얻고 있어서 이런 제목을 붙였다고 합니다. 특히 ‘달빛’은 시인의 문학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이 책은 소설가 김형수와 나눈 대담 형식으로 적혀 있는데, 사실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생님, 책 내용이 너무 어려워요~”

이런 투정 앞에 시인은 너무도 당연하게 인정을 합니다.

“여기 대화는 인문적입니다.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는 아니죠. 여기서 내가 하는 대화는 매우 지적이고, 광범위한 정보로 뜻을 전개하기 때문에 아무나 쉽사리 다가갈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이에 반해 일기는 너무도 술술 읽힙니다. 남의 삶을 들여다보는 관음증 환자 같기도 하지만,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한 장 한 장 읽을 때마다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1970년대를 살아보지는 않았습니다만, 드라마와 영화로 접할 기회가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화면처럼 떠올랐나 봅니다. 1970년대 일기라서 당연히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과 유신체제, 그 속에서 벌어진 인혁당, 민청학련 등의 사건들, 또 시인이 몸담았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설립과 운영 과정이 상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현대사의 또 다른 기록인 셈입니다.

책 속에는 또 ‘그 긴 치마. 그 웃음. 그 비정치적인 기품’이라고 표현한 고 육영수 여사에 대한 기록과, ‘딸이 아버지에게 하야를 권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럽으로 내보냈다고 한다’라는 당시 떠돌던 소문도 적혀 있습니다.

당사자인 박근혜 씨가 대통령 당선인이 된 지금 이 시점에 당시의 일기를 책으로 펴내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을까. 시인은 새해 벽두에는 서로 덕담만 하는 것이라며 극도로 말을 아꼈습니다. 하지만, 시인답게 조금은 형이상학적인 말을 꺼내놓습니다.

“어떤 시대는 이전에 쌓아왔던 것의 귀결이 아닙니다. 지금 역시 미래의 어느 시기에서의 원점이 될 수 있죠. 나는 한 시대를 규정해서 그 시대만 집착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과정의 일부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산더미 같은 문제가 쌓여서 대선 이후 정치가 새로 전개될 것”이라면서도, 박 당선인이 거론한 ‘사회통합’을 두고 조언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회 통합은 물질적·정신적 기반을 만들어야 가능합니다. 통합은 최후적인 명제가 되어야 합니다. 통합이 되도록 간극을 메워야 하고, 물이 없으면 마중물을 줘서 물이 나오게 해야 합니다.”

한 때 저항시인으로 함께 했던 소위 ‘김지하 시인의 변절’에 대해서도 역시 “새해에는 덕담만 하자”며 답을 피했습니다.

‘저항 시인’ 말고도 고은 시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노벨문학상 후보’입니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주요 후보로 거론이 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가 될 수 있을까 초미의 관심이 쏠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날, 경기도 안성에 있는 시인의 자택 앞에 취재차 가 있다가 허탈하게 돌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시인에게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물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는 ‘시인이 집 안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 ‘모처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는 등 시인의 행방에 대한 갖가지 이야기들이 떠돌았습니다. 시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음 달에는 베니스대학에서 초청을 해 와 명예 학위와 함께 한 학기 동안 연구와 강의 활동을 하게 되고, 9월쯤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3~4명의 유럽 시인들과 함께 ‘시 페스티벌’에도 참석할 예정이라는데요, 노벨상을 비롯해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데 대해 시인은 ‘나의 업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의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심을 지속시키고, 국내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나를 좋아하고 그럴 땐, 나 역시 그들을 좋아해야 할 사명이 생깁니다. 그래서 같이 자주 만나서 잔치를 벌이고는 합니다.”

“하지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데도 관심을 받는다면 그건 사양해야 합니다. 내가 진지하게 문학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에는 그에 대한 보람으로서 관심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오만’과 ‘겸허함’,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뭉뚱그린 답이었지만 참으로 솔직한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올해 10월에도 시인의 집 앞에 찾아가게 될 텐데, 올해는 기다리기만 하다가 그냥 돌아오지 않고 꼭 기분 좋은 취재와 보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도 시인은 외부 약속이 없는 날이면, 오후에는 시를 쓰고, 밤에는 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새로 나오는 책들은 거의 빠짐없이 다 읽는다고 합니다.

“독서는 나의 종교 행위이다. 책방은 나의 절간, 교회이다. 책방은 참으로 신성한 곳이다.”

시인의 독서예찬론입니다. 시인은 현재 책보다 스마트 기기가 더 사랑받고 있는 실태를 우려하면서, 언젠가는 책이 다시 주목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 폰으로 실컷 놀다가 문득 자기가 돌아보게 되는 지평선이 있을 겁니다. 그 때 다시 책으로의 귀환이 있지 않을까.”

시인은 책과 문학이 다시 주목받는 그 날을 위해 ‘부흥 운동’을 벌이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앞으로도 꾸준히 시를 쓸 생각입니다. 시 얘기를 하는 시인의 표정은 그 어떤 아이보다도 해맑아 보였습니다.

“시의 지향, 시를 꿈꾸는 행위, 이것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시인이라는 사실에서 보면, 나는 여전히 철이 들지 않은, 별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같은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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