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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여기가 없어지면 저희는 어떻게 하죠?"

유통업체 문화센터 어린이 강좌 폐강 논란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문화센터에서 개설한 강좌를 듣거나, 자녀를 보내본 적이 있으신가요. 문화센터엔 바이올린, 발레, 드럼 등 사설학원에서 들을 수 있는 강좌들도 있지만, 클레이 공예나 종이접기, 어린이 요리교실 등 다른 곳에서 접하기 힘든 수업들이 많아서 인기가 좋습니다.

국내 3대 백화점과 대형마트에 겨울방학이 시작된 지난달 문화센터 강좌 수강생 규모를 문의했더니, 모두 합해 전국에서 약 90만 명이나 됐습니다. 이중 약 25%에 달하는 22만 명이 만 3세에서 고등학생까지, 어린이와 청소년들입니다.

그런데 최근, 강원도 춘천의 한 대형마트 문화센터 복도에 “앞으로도 문화센터에서 유아, 어린이 대상 강좌를 계속 듣고 싶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수강생과 학부모 일동’의 호소문이 나붙었습니다. 이 점포의 문화센터 수강생은 이 달만 천 4백명. 그중 절반 가량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인데,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좌가 폐강될 수 있다고 해당 마트측이 통보해 온 겁니다. 강원도 원주의 원예하나로마트는 아예 이미 지난달에 수강생 천 명 규모의 문화센터 수업을 모두 폐강하고, 미리 받은 수강료를 환불해 줬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이제 어린이와 청소년은 문화센터 수업을 듣지 못하게 되는 게 맞습니다. 현재 상태로선, 앞으로 백화점이나 마트 문화센터에서 어린이/청소년 대상 강좌는 강원도부터 단계적으로 폐지될 겁니다.

지난 2011년 7월 개정된 학원법이 적용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학원법은 수강료 불법인상을 막고 불법교습소 등을 근절해 미성년 학습자 보호를 강화한다는 취지로 개정됐는데, 이때 개정 내용 중 “만 3세 이상부터 고등학생까지 가르치는 곳은 ‘학원’으로 정의한다"는 조항이 생겼습니다. (전에는 ‘국영수’ 같은 교과과정을 다루지 않는 한, 이 연령대의 학생들을 가르치더라도 학원 등록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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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항에 따르면, 그간 ‘학원법’에 따른 ‘학원’이 아니라 ‘평생교육시설’로 등록해 온 백화점과 대형마트 문화센터는 앞으로는 학원으로 등록해야 어린이/청소년 수강생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학원법 개정 이후 각 지자체마다 새 법을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유예기간을 뒀는데, 국내 처음으로 강원도에서 지난달 말로 이 유예기간이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당장 강원도의 대형마트 문화센터들이 현재 개설하고 있는 어린이/청소년 대상 강좌는 일종의 불법 강좌입니다. 내년 2월 서울까지, 전국 16개 시도 지자체가 대부분 올해 안에 이렇게 바뀝니다.

그럼 문화센터들이 학원으로 등록으로 하면 되잖아?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현재 문화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국내 대형 유통업체들은 “그러느니 차라리 어린이/청소년 대상 강좌를 폐강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유통업체들이 학원업 등록을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평생교육시설’보다 ‘학원’ 기준이 훨씬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미성년을 가르치는 학원은 더 엄격한 자격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미성년자들의 안전 문제 때문에, ‘학원’은 지하에 지을 수 없습니다. 또 피아노면 피아노, 바이올린이면 바이올린 등 강좌 목적에 맞게 시설 기준들도 각각 다르게 갖춰야 합니다. 강사는 최소 전문대 이상의 학력을 갖춰야 하고요. 이밖에도 다양한 기준이 있는데, 아무튼 이런 기준들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학원 등록은 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문화센터의 경우, 매장을 운영하고 남은 자투리 공간에 문화센터를 개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마트 문화센터는 현재 지하에 위치한 곳이 적지 않습니다. 또 강의실 한 두 곳에서 시간대만 달리하면서 여러 가지의 강좌를 개설하고 있어, 학원 시설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곳이 대부분이죠. 유통업체 문화센터는 사실 수익사업이라기보다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마케팅용 성격이 강한 일종의 고객서비스인데, 학원 자격을 갖추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이런 부분들을 개선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차라리 어린이/청소년 강좌는 포기하겠다는 겁니다.

학원업 등록을 할 경우, 대기업들이 학원까지 진출하려고 한다는 시선을 받게 되는 것도 부담입니다. 실제, 국내 대형 유통업체 중 유일하게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가 개정 학원법에 대비해 지난해 학원업 등록을 마쳤는데, 당시 학원업계는 “대기업이 전통시장처럼 일종의 ‘골목상권’인 학원업까지 넘본다”고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신세계그룹은 이후 “학원업으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고, 내부적으로도 다른 유통업체들과 마찬가지로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면 단계적으로 어린이/청소년 강좌를 폐강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만약 유통업체가 큰 돈과 공간을 확보해 학원설비를 제대로 갖춘다? 그거야말로 “우리가 학원도 한 번 제대로 해보겠다”는 학원업 진출 선언이죠. 결국 개정 학원법은 문화센터에선 어린이/청소년을 받지 말거나, 어린이/청소년 대상 강좌를 대폭 줄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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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연간 80만명이 넘는 어린이/청소년 문화센터 수강생들은 다 학원으로 가면 그만일까요? 취재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유통업체 문화센터가 상대적으로 학습 환경이 다양하지 않은 지역에서 적잖은 교육기회를 제공해 왔다는 점입니다. 강원도 삼척에 있는 홈플러스에 가봤는데요. 이곳에서 열고 있는 토요일 발레교실엔 현재 90명의 어린이들이 다니고 있습니다. 삼척에 사는 어린이들 뿐 아니라 동해시, 경북 울진군에서도 옵니다. 동해, 삼척, 삼척에 붙어있는 경북 울진을 통틀어, 발레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이 문화센터를 포함해 단 두 곳뿐이거든요. 삼척에 있던 딱 하나 있던 무용학원도 얼마 전 폐원해 버렸답니다. 그러니 발레를 배우고 싶은 어린이들, 자녀들에게 무용교육을 시켜주고 싶은 부모들은 왕복 2시간씩 걸려서 매주 마트에 오는 겁니다. 3년째 이 문화센터에서 아이에게 발레를 시키고 있다는 한 어머니는 제게 “사는 동네에 보습학원 몇 개랑 태권도 학원 딱 하나 있어요. 그런데 여기가 없어지면, 뭘 시켜줘야 할지, 주말에 애들 데리고 어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하소연하시기도 했습니다.

발레뿐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문화센터에는 어린이 요리교실이나 종이접기 수업, 진흙공예 수업 등, 학원에서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문화수업’들이 있습니다. 학원이 많은 서울에서도 이런 수업들이 인기가 많은데, 사설학원이 다양하지 많은 지역에선 더 말할 것도 없죠.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문화센터 수강료는 보통 3개월에 8만원에서 10만원 정돕니다. 보통 일주일에 한번씩 강좌가 있기 때문에 교과부 주장대로 단위시간 1분당 수강료는 사실 그렇게 저렴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단위시간으로 수강료를 계산하는 건, 그야말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려는 행정이죠.

문화센터 수업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상당수가 학원에서 잘 개설하지 않는 다양한 ‘문화수업’들입니다. 횟수도 딱 일주일에 한 번이 적당하고 수강료도 한 달에 2-3만원 정도가 적당하다고 느낄 만한 강좌들인 겁니다. 제가 만난 어머니 한 분은 딸이 태권도와 발레를 모두 배우고 싶어해서, 태권도는 학원으로 발레는 문화센터로 보낸다고도 하셨습니다. 딸이 태권도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태권도는 일주일에 세번씩 수업하는 학원에 보낸다고요. 공부도 시켜야 하고 태권도도 시켜야 하는데, 발레까지 일주일에 서너번씩 배우게 하는 건 돈도 너무 부담되고 시간도 부담이 돼 문화센터가 사라지면 아무래도 발레는 더 이상 시키지 못할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또다른 어머니는 본인은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면서, 5학년 아들은 문화센터에서 바이올린과 드럼을 배우게 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일주일에 딱 한 시간 정도씩 수업하는 게 적당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개인교습도 있겠지만, 그럼 또 돈이 너무 많이 들고요.”

한 마디로 문화센터는 사교육시장에서 일종의 ‘틈새 공급자’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런 순기능을 그대로 사라지게 하는 게 맞는 걸까요.

문화센터에 대한 학원업계의 거부감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피교육자를 좀더 제대로 보호한다는 개정 학원법 입법취지에 맞게, 유통업체들이 앞으로도 어린이 대상 문화센터를 운영하려면 학원업 등록을 하고 기준을 맞춰야 한다는 교육 당국의 주장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진 않을 것이고, 지금 있는 연간 80만여 명의 어린이/청소년 수강생들이 배우던 것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좀더 정교한 행정으로 대안을 모색할 수는 없는 걸까요.

삼척에서 만난 9살 민선이(가명). “발레 재밌니?”라고 묻자 눈을 빛내며 “정말 재밌어요.”라고 배시시 웃던 민선이가, 제가 본 그 예쁜 모습처럼 토요일에 토슈즈를 신고 풍성한 튀튀를 차려입었지만, 갈 곳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느끼면서 했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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