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분이 조금 지나 안철수 후보가 카메라 앞에 섰다. 앞서 속보로 '안철수-문재인 측 "남은 것은 후보간 대화와 협의뿐"', '안철수, 문재인에 단일화 담판 제안할 듯'이라는 속보들이 계속 뜨고 있던 상황이라 '기껏해야 후보 회동 제안이나 하겠구나' 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TV를 봤다. 하지만 안 후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저는 오늘 정권교체를 위해서 백의종군할 것을 선언합니다."였다.
퇴근하긴 날샜다라는 생각에 가방을 싸서 즉시 새누리당사로 달려갔다. 당사 기자실은 한산했다. 잠시 뒤 밥먹다 말고 들어오는 사람부터 하나 둘씩 자리를 채웠다. 대변인들도 첫 반응을 어떻게 내야할지 혼란스러운지 얼른 논평을 내놓지 못했다. 그만큼 안철수 후보의 사퇴 선언은 전격적이었고 또 충격적이었다.
◈ 새누리당, "손해볼 것 없다"
선대본부 회의 도중 사퇴 소식을 접한 새누리당 지도부는 급히 대책 논의에 들어갔다. 먼저 안 후보의 사퇴가 미칠 파장에 주목했다. 결론은 안 후보의 전격 사퇴로 단일화가 성사됐지만 파급력은 크지 않을 것이란 쪽으로 모아졌다.
무엇보다 안 후보가 마음 속으로 승복해 양보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듯 했다.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 줄다리기 속에서 감정이 상할 만큼 상했고 자신의 마지막 제안마저 수용되지 않자 스스로 후보직을 던진 만큼 이른바 '아름다운 단일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해석이었다.
특히나 안철수 후보가 기자회견에서 "단일화 과정의 모든 불협화음에 대해 저를 꾸짖어 주시고 문재인 후보께는 성원을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하긴 했지만 안 후보 본인이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점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다.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순 없지만 어쨌든 (안철수 후보가) 기존 정치권의 수에 말린 거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지."라고 말했다. 또 안 후보측 이탈자를 최대한 흡수해야 하는 만큼 최대한 안 후보 지지자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정책과 민생행보를 이어간다는 전략을 바탕으로 문재인 후보와 일전을 치르겠다는 뜻도 밝혔다.
새누리당은 안철수 후보의 사퇴를 '단일화의 완성'이 아닌 '야권의 분열'로 보고 '손해볼 것 없다'는 판단을 내린 듯 보였다.
◈ 민주통합당, 기대 반… 우려 반
안철수 후보가 오후 8시 20분 기자회견을 하겠다는 예고가 나오자 민주통합당 당사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불과 30분 전인 7시50분쯤, 단일화 협상을 위한 특사 간 회동이 성과 없이 끝난 직후여서 캠프 관계자들은 초조함 속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직자들 사이에서는 후보 간 담판 제안, 단일화 결렬 후 후보 등록 선언 등 숱한 말이 오갔지만 후보직 사퇴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8시20분. 단상에 올라선 안 후보가 "정권교체를 위해 백의종군하겠다"고 운을 떼자 캠프에선 충격 속에 탄식이 터져나오며 술렁였다.
한두 명이 "야, 이겼다!"라고 외치기도 했지만 대부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듯 TV 화면을 통해 전해지는 기자회견에 집중하며 침묵을 지켰다. 야권 단일 후보가 됐다는 기쁨이 없진 않았지만 협력해 나가야 할 파트너인 안 후보가 사전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사퇴를 선언하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상황실, 비서실장실, 각 본부실에 있던 관계자들은 일부는 앉은 채로 일부는 선 채로 화면을 주시했다. 서로 대화도 없었고, 웃는 사람도 없었다. 취재진이 반응을 살피기 위해 방마다 문을 열자 한 관계자가 "혹여 환호를 지르거나 하는 일이 없게 살펴보라"고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실제로 총무본부에서는 '안철수 후보 사퇴 기자회견에 대해 발언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캠프 관계자들에게 발송하며 재차 주의를 당부하기도 했다.
극도로 말을 아끼는 가운데 밤 9시 반쯤 회의를 마치고 나온 이낙연 공동선대위원장은 "생각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는 큰 결심"이라고 평가했다. 또 "안 후보의 결심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가 있지 않겠나" 라며 "안 후보를 사랑한 국민이 받은 충격과 슬픔이 있을 것이기에 이 시점에 정무적인 것을 생각할 수 없다"고 밝혔다.
민주통합당은 야권 단일 후보가 됐다는 안도감 속에서도 안 후보를 어떻게 끌어 안을지를 놓고 고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발생한 돌발 변수에 민주통합당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애매한 표정이었다.
◈ 안철수 사퇴… 단일화 효과는?
안철수 후보의 사퇴로 문재인 후보가 일정 부분 지지율 상승 효과를 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그동안 야권 후보 단일화 협상이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쌓인 유권자들의 피로감이 안철수 사퇴로 일거에 해소된 측면이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효과의 강도를 놓고는 해석이 갈린다.
먼저 일부에서는 전격적인 사퇴 선언으로 파괴력이 극대화돼 단일화 효과도 그만큼 커질 것이라고 평가한다. 반면 단일화 줄다리기 과정에서 안 후보가 마음 속에 앙금이 남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사퇴를 선언한 만큼 득보다는 실이 더 클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24일 긴급 실시된 SBS와 MBC 여론조사 결과만 봐도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지지율이 오차 범위 안에서 서로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으로 나왔다. 안 후보의 사퇴 효과를 예단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얘기다. 앞으로 안 후보가 '적극 지지', '소극 지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대선 판도가 좌우될 수도 있다.
대선 무대에서 퇴장했지만 안철수 후보의 지지층을 놓고 벌어질 박근혜-문재인 두 후보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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