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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가져오기만 하면 돼!” 기술 유출이 계속되는 이유

[취재파일] “가져오기만 하면 돼!” 기술 유출이 계속되는 이유
“일단 유출되면 끝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53살 노 모 씨는 자동포장 기계를 만드는 중소기업의 연구 소장이었습니다. 처음은 좋았습니다. 고교 동창이 대표라 회사 생활도 편했고, 지난 해 개발된 회사 제품이 지식경제부에서 산업기술로 인증받아 수출 실적도 크게 올랐지요. 종이를 접고 접착해 상자를 만드는 이 기계는 기존 제품보다 속도가 서너 배 빨라 독일, 스위스와 함께 세계 최고로 꼽혔습니다.

지난 해 9월 노 씨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회사에서 업무 실적 등을 이유로 감봉 조치를 받은 것이지요. 순식간에 연봉 2천만 원이 깎여 5천만 원만 받게 된 겁니다. 이 때 일본의 경쟁사가 노 씨에게 접근했습니다. “연봉 1억 원을 줄 테니 기술을 넘기고 우리 회사에서 일하라.” 일본 회사의 대표는 노 씨의 고향인 울산까지 내려가 설득을 했고, 결국 기계의 설계 도면을 넘겨받았습니다.

‘기술을 선점하는 자가 세상을 가진다.’ 세계 시장에서 표준으로 인정받는 기술을 갖기 위한 기업들의 싸움은 ‘총성 없는 3차 대전’에 비유되곤 합니다. 미제로 남을 것으로 보이는 지난 8월 삼성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 도난 사건도 기술 유출 의혹이 강하게 남아있지요. 실제 지난 해 경찰에 적발된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모두 84건으로 2004년에 비해 5배가 넘습니다. 대개는 위의 사례처럼 회사 내부자가 기술을 해외 기업이나 대기업에 넘겨 버리는 경우입니다. 

경찰은 “기술 유출의 정말 큰 문제는 일단 유출되기만 하면 되돌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일본에 기술을 넘긴 노 씨나 일본 기업의 한국 지사 대표는 모두 불구속 입건됐습니다. 검사는 최장 20일까지만 피의자를 구속하고 기소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술 유출 사건의 경우 20일 만에 해당 기술을 이해하고 기록을 검토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검사가 구속영장 청구에 소극적이고, 불구속 수사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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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법원의 경우,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하면서 사본만 확보하고 원본 확보는 제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기술을 빼내 간 것으로 의심되는 기업이라도 기술 원본 데이터를 함부로 압수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약 원본 데이터를 가져왔다가 기술 유출이 아닌 것으로 판결이 나오면 법원도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해외 기업의 경우엔 영장을 발부받더라도 실제 압수수색을 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릅니다. 아예 처음부터 틀어막고 압수수색을 거부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지요.

피해 업체가 보상을 위해 민사 소송을 제기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습니다. 기술을 빼내 간 기업이 수사나 재판과정을 일부러 늘리기 때문입니다. 경찰은 “기술 유출의 경우 민사 소송이 보통 1년 정도 이뤄지는데 이 기간 동안 기술을 빼 간 기업들이 기술을 상용화해 이득을 볼만큼 다 본다”고 말합니다. 일단 기술을 가져오기만 하면 ‘불구속 된 상태’에서 ‘확보한 원본 기술을 활용’해 ‘재판기간을 늘려’가며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다는 겁니다.

연구 소장 노 씨는 ‘토사구팽(兎死拘烹)’ 당했습니다. 일본 기업이 기술만 가져가고 애초에 약속했던 이직 약속은 저버린 것이지요. 한편으로는 노 씨의 사연도 안타깝지만, 피땀 흘려 개발한 기술을 순식간에 뺏긴 기업들의 얘기에는 분통이 터집니다. 기술을 뺏기는 기업들의 상당수는 중소기업입니다.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한 번 기술을 빼앗기면 다시 살아날 수 없는 회사들이지요. 국부 유출로 인한 국가 경제 손실을 막기 위해서도, 누군가의 일터인 중소기업을 위해서도. 기술 유출을 막는 방안에 대한 좀 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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