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독도 어장에 진출, '독도 지킴이'로 나섰던 제주 해녀들의 역할을 조명한 논문이 발표됐다.
김수희 영남대 독도연구소 연구교수는 10일 한일관계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할 연구 논문 '해방 후 독도 어장에 대한 어민인식과 어업 활동'에서 해방 후 독도어장에 진출한 제주 해녀들을 조명했다.
해방 후 독도어장 관리와 제주 해녀들의 독도 어장 진출을 분석한 것은 이 논문이 처음이다.
독도는 해방과 함께 우리 어민들에게 돌아왔다.
독도 어장은 국내 최고의 오징어 어장이자 미역 어장이었다.
주한미군사령부가 1948년 1만 6천 명의 어민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곳이라고 보고할 정도로 중요한 어장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1953년 일본인들이 독도에 푯대와 어업 금지 팻말을 세우는 등 독도를 불법 침탈하자 울릉도 출신의 홍순칠은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자체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미역 채취업을 했으며 제주 해녀를 모집해 어장을 운영했다.
김 교수는 "제주 해녀들이 독도에 직접 건너간 것은 1953년 이후 독도의용수비대가 해녀를 모집해 고용한 이후"라면서 "당시 해녀들은 독도의용수비대에 고용된 노동자였지만 일본의 침탈 야욕에 맞서 (독도에) 상주하는 독도의용수비대와 함께 독도 지킴이에 큰 일조를 했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 동도에 자리 잡았고 해녀들은 독도 서도 물골에서 생활했다.
해녀들은 독도의용수비대가 물과 식량이 부족한 독도에서 생활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독도의용수비대가 먹을 물이 떨어져 곤경에 처했을 때 해녀들은 서도 물골에서 물을 실어 동도에 살던 대원들에게 전달했으며, 파도로 울릉도 보급선이 독도에 접안할 수 없어 대원들이 아사 직전의 위기에 놓였을 때도 해녀들이 풍랑 속에 뛰어들어 부식물을 받아왔다.
김 교수는 "의용수비대들이 기아 위험에 처하자 제주 해녀들이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풍랑 속에 뛰어들어 식량을 조달했다"면서 "(의용수비대가 독도에) 장기간 거주할 수 있게 된 것도 제주 해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홍순칠 대장의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독도에 해녀 50명, 보조원 20명 등 100명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교수는 "어업 공간이 없는 해녀들은 독도만큼 훌륭한 어장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협하는 악조건을 참아내면서 독도에서 생활했다"면서 "1956년에는 한해에 30-40명의 해녀들이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전했다.
해녀들은 3월부터 6, 7월까지 독도에서 생활했으며 식량이 부족하면 갈매기알을 삶아 먹거나 쑥을 넣어 죽을 끓여 먹었다.
아이가 있는 해녀들은 독도에 갈 때 아이들도 데리고 갔다.
김 교수는 "독도에 간 해녀들은 생계를 위한 활동에만 전념하지 않고 독도의용수비대를 보좌해 함께 독도를 지켜나갔다"면서 "독도를 지킨 독도의용수비대와 경비대의 활동 뒤에는 제주 해녀들의 숨은 노력과 공로가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제주 해녀들은 '독도지킴이'였다"
김수희 교수 '독도어장과 제주 해녀'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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