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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롬니는 왕따?…허리케인 샌디가 미국 대선에 미치는 영향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의 정치 승부수<br>정치판에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취재파일] 롬니는 왕따?…허리케인 샌디가 미국 대선에 미치는 영향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뉴욕시간으로 일요일 점심 때입니다. 이제 미국 대선이 이틀 남았습니다. 미국 동북부를 사상 초유의 허리케인이 덮치면서, 정치권은 지금 계산이 복잡합니다.

대선후보 토론 이후 상승세를 타던 공화당 롬니 후보는, 허리케인 샌디 상륙 이후 TV화면에서 보기 어려워 졌습니다. 하필 태풍이 미국 미디어들의 수도인 뉴욕 일대를 덮친 탓에, 미국 TV들은 재난방송에 가까운 뉴스 보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롬니는 대선 후보일 뿐 '당국자'가 아니므로, 이런 상황에선 뒷전에 밀릴 수 밖에 없지요. TV가 비춰주는 정치인은 오바마 대통령, 블룸버그 뉴욕 시장,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 쿠오모 뉴욕 주지사 같은 '현직'들입니다. (블룸버그는 대선 출마 계획이 '현재로서는 없는' 사람이지만, 크리스티와 쿠오모는 공화-민주 양당의 '차기' 주자들입니다.)

롬니는 특히, '작은 연방정부'를 지향한다며 '연방 재난관리청(FEMA)'을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던 적이 있는데, 허리케인 샌디 피해 복구 과정에서 재난관리청이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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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방재난관리청(FEMA)을 비난하던 '작은 정부' 신봉자 (공화당원)들이 이번 태풍에서 FEMA의 도움을 받고 있음을 풍자하는 신문 만화.
 
반면, 오바마 대통령은 위기 극복을 지휘하는 지도자상을 보여주며 정치적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최대 정적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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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는 뉴욕시에서 허드슨 강 건너 서편으로, 뉴욕시의 주거-산업 배후단지 역할을 합니다.
 
크리스티는 백인 서민층이 좋아하는 공화당 정치인입니다. 오바마나 롬니가 미국 보통 사람들 사이에선 쉽게 보기 힘든 날씬한 건강체형인 반면, 크리스티는 하루 세끼 햄버거에 감자튀김만 먹고 사는 사람처럼 뚱뚱합니다. 욕설에 가까운 거친 표현 , 아이비 리그 나온 사람들이 잘 쓰지 않을 저속한 표현들도 거침없이 구사합니다. 덜 배운 서민들-특히 백인 저소득층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는 정치인입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공화당은  롬니를 대선후보로 확정하기 전, 크리스티에게 러브콜을 보냈었습니다. 크리스티는 그러나 준비 부족을 이유로 출마를 포기했고, 대신 4년 뒤를 노리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는 롬니가 공화당 후보로 확정되는 전당대회에서도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오바마를 거칠게 비난하는 발언들을 자주 해, '오바마 저격수'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그랬던 그의 지역 뉴저지주가 이번 허리케인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뉴저지 해안을 통해 샌디가 상륙했거든요. 연방정부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그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집니다. 대선 턱밑에 자기 당 후보인 롬니 지원을 포기하고, 자신의 정적인 오바마에게 러브콜을 보낸 겁니다.

허리케인 샌디가 휩쓸고 지나간 뒤, 오바마 대통령은 처음엔 뉴욕시를 방문하겠다고 했습니다. 뉴욕시장 블룸버그는, 피해 복구가 바쁘다며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블룸버그는 갑부이지만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아이디어들도 포용하는 사람으로, 공화-민주 양당간 중립을 지켜왔습니다.) 그러자 오바마는 뉴저지 방문을 타진합니다. 평소의 크리스티라면 어땠을지 모르겠는데, 크리스티는 오바마의 방문을 아주 따뜻하게 환영했습니다. 그러면서 온갖 칭찬을 늘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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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걷고 있는 오바마와 크리스티. 매우 지적이며 공정한 가운데 굳이 따지자면 민주당 성향인 공영방송 PBS는, "오바마 대통령이 새로 찾은 베스트 프렌드 크리스티와 함께 피해지역을 돌아보았다"고 풍자하기도.
 
"오바마가 재난 극복을 대통령답게 훌륭하게 이끌고 있다", "지도자 답다", "관료주의 절차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게 도와준다" 등등.. 크리스티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 상상할 수 없었던 칭찬들이 며칠에 걸쳐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과정에, 은근히 자기 자랑도 섞어 넣었습니다. "대통령이 나에게, 몇명 밖에 모르는 핫라인 넘버를 주었다. 그 번호로 오늘도 30분 넘게 통화하면서 협의를 했다", "모든 난제는 내가 직접 대통령과 담판해 해결하겠다.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FEMA(연방 재난관리청) 폐지 공약 때문에 기자들로부터 혼쭐이 난 뒤 뉴스에서 사라진 롬니는, 자신의 편에서 오바마를 저격하던 크리스티의 정치적 배신에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크리스티는 왜 그랬을까요? 단지 대통령으로부터 연방정부의 대규모 행정/예산 지원을 신속히 끌어내려는 것 뿐이었을까요?

정치인의 행동은 그것만으로 성공할 수 없지요. 크리스티는 '차기'를 노린 승부수를 던진 것으로 보입니다. 당초 공화당 안팎의 '출마'러브콜을 고사할 때,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크리스티가 '천재일우의 기회를 걷어찼다'고 보았습니다. 조직과 자금을 갖출 준비가 안 됐다며 공화당 내 경선 출마를 포기했는데, 가장 중요한 '천기'는 조직과 자금을 나중에 갖추었다고 해서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크리스티에게 '초유의 자연재해'라는 형태로 기회가 한 번 더 찾아온 겁니다. 크리스티는 자신을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기극복 지도자'로 세일즈할 절호의 찬스를 잡았습니다.

게다가, 롬니의 당선이 자신에게 유리한 것도 아닙니다. 롬니가 이번에 대통령이 되면, 4년 뒤 대선은 롬니 대통령 vs. 민주당 후보의 구도로 치러지게 됩니다. 크리스티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반면 롬니가 이번에 낙선하면, 자신은 4년 뒤 공화당 후보가 되어 민주당의 새 후보 (오바마는 삼선 불가)와 맞붙는 꿈을 꿀 수 있습니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오바마를 환대하는 크리스티의 진짜 속셈은 이것 아닐까 짐작됩니다.

일단 미디어를 통해 감지되는 분위기는, 허리케인 샌디 상륙 이후 오바마가 다소 유리한 국면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문제는 미디어에 보도되지 않는 중남부 백인들의 속마음인데, 이제는 정말 코앞으로 닥친 미국 대선, 어떤 결과가 나올지 흥미진진합니다. (참고: 다수의 미국 미디어들은 자유주의 성향이어서, 민주당 친화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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