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중앙은행이 정부의 지시에 따라 '돈을 푸는 기계'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일본은행은 30일 열린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정부와 "디플레이션 조기 탈출이 매우 중요한 과제라는 인식을 공유하며, 일체가 되어 과제 달성에 최대한 노력한다"는 공동문서에 서명했다.
공동문서는 또 "일본은행은 '중장기적 물가안정 목표'인 물가상승률 1%가 달성될때까지 강력한 금융완화를 추진한다"고 명기했다.
이 공동문서에는 시라카와 마사아키(白川方明) 일본은행 총재와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경제재정담당상, 조지마 고리키(城島光力) 재무상이 서명했다.
공동문서의 '정신'에 입각해 일본은행은 11조엔의 추가 금융완화를 단행했다.
2개월 연속 금융완화였다.
공동문서는 일본은행의 금융완화가 성에 차지 않는다며 불만을 표시해온 마에하라 경제재정담당성이 주도하고,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와 조지마 재무상이 찬성해 이뤄진 일본은행과의 사실상의 '정책협정'이다.
정부는 앞으로 이 공동문서를 고리로 일본은행에 과감한 금융완화 압력을 가중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행이 정부에 코뚜레를 꿰인 것이다.
일본은 정부가 중앙은행을 '재무성의 하청기관'으로 지배하면서 분별없이 돈을 찍어내다 '버블'이 폭발한 반성으로 1998년에 일본은행법을 고쳐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대폭 강화했으나 14년 만에 정부가 다시 중앙은행 통제에 나섰다.
골드만삭스증권의 바바 나오히코(馬場直彦)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은행에 대한 정부의 그립(GRIP)이 강화됐다"면서 향후 일본은행이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금융완화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평가했다.
미즈호증권의 우에노 야스나리(上野泰也) 선임 마켓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은행의 퇴로가 차단됐다"고 말했다.
과거 야당이었을 때 중앙은행 독립성을 외쳤던 민주당 정권이 표변한 것은 장기침체로부터의 탈출, 총선을 앞둔 정부의 경기 부양 욕심, 소비세 인상을 위한 환경 조성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재정건전성이 선진국 최악의 상황으로 악화해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더 이상 빚(국채 발행)을 낼 수 없다는 점도 작용했다.
장기침체에 빠진 일본 경제는 급속한 고령화, 작년 발생한 동일본대지진, 중국을 비롯한 세계경제의 감속, 엔고 등으로 부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달 초 전망에서 일본 경제가 올해 2.2%, 내년에 1.2%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은행은 올들어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해 인플레이션(소비자물가 상승률) 목표를 1%로 제시했으나 소비 부진으로 올해는 마이너스 0.1%, 내년도에는 0.4%, 2014년도에는 0.8%에 머물 것으로 예상된다.
내각 지지율이 20% 안팎으로 추락한 노다 정권은 총선을 앞두고 경제에서 실적을 쌓아야 한다는 절박함에 쫓기고 있다.
경기 부양에 신경을 쓰지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노다 총리가 '정치생명'을 걸고 추진한 소비세 인상을 위해서도 성장률 높이기는 시급한 과제이다.
지난 8월 국회를 통과한 소비세 인상 관련법은 '경제 상황의 호전'을 전제로 못박았다.
자민당도 국민 반발을 우려해 경제 상황이 호전돼야 소비세를 올릴 수 있다고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재계가 일본 경제 침체의 주범이라며 비명을 지르는 엔고를 해소하기 위해서도 중앙은행이 대담하게 돈을 풀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돈을 아무리 풀어도 생산과 투자, 소비가 늘지않는 이른바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다.
고령화와 장기 침체로 자신감을 잃은 국민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지갑을 열지 않고 있다.
일본은행은 제로 금리를 유지하는 한편 올들어 금융완화를 통해 무려 36조엔(약 490조원)을 풀었지만 경기에 별 자극을 주지 못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31일 "정부가 이례적으로 일본은행과 공동문서를 발표하고, 압력을 넣어 금융완화를 했지만 민간의 자금수요가 부진한 현실에 변화가 없어 실효성이 의문시된다"고 보도했다.
마니니치신문도 "일본은행의 자체 조사에서도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이 적어, 은행이 융자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금융완화의 시장 임팩트를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일련의 정부 움직임을 보면 정치가 스스로의 기능이 중단되자 일본은행에 (경기 침체 해결의) 부담을 떠넘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올해 예산 운용에 필수적인 특별공채법안을 하루빨리 통과시켜 정부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비판했다.
(도쿄=연합뉴스)
일본 경제난에 중앙은행 독립성 '와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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