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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인신매매 브로커 있었다"

전경목 한중연 교수 분석.."몸값의 최대 절반 수수료로 챙겨"

"조선시대 인신매매 브로커 있었다"
"저는 본래 평해에 살던 사람으로 마침 대흉년을 당하여 (가족과 함께) 유리걸식(流離乞食)을 하다 지난해 9월에 저의 아비가 끝내 영덕에서 굶주려 죽고 말았습니다. (중략) 지금 유골을 수습하여 땅에 묻어주려 생각해도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저와 저의 여동생 귀매가 위 댁에 애걸하여 (저희들의 몸값을) 7냥으로 결정하고 관(棺)과 장례에 드는 물품들을 구매하였습니다. 저는 종신토록 복역하고 (여동생) 귀매는 후소생을 아울러 영영 보은(報恩)할 뜻으로 이에 문서를 작성하니 뒷날 (저의) 족속 중에 혹시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있거든 이 문서를 가지고서 관에 고하여 바로잡을 일입니다."

이 글은 김고지(金高之)라는 사람이 1815년(순조 15) 작성한 자매문기(自賣文記)다.

자매문기는 '자기 자신을 남에게 파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문서'라는 뜻으로, 조선 후기에는 먹고 살기 어려워 자신이나 가족을 노비로 파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김고지 가족은 흉년이 들어 고향을 떠나 유리걸식하던 중 영덕에 이르렀는데 가장인 아버지가 굶어 죽고 말았다. 김고지와 그의 여동생 귀매는 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해 땅에 묻으려 해도 돈이 없었다. 결국 김고지는 단돈 7냥에 자신과 여동생을 이 생원댁에 팔고 그 돈으로 관과 장례 물품을 사 아버지 장사를 지냈다.

문제는 김고지와 그의 여동생 귀매의 나이가 겨의 아홉 살과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아무리 유교의 이념이 지방의 하층민에게까지 스며든 사회였다 하더라도 겨우 9세와 5세밖에 안 된 김고지와 귀매가 '자식 된 정리'를 운운하며 자신들의 몸을 팔아 죽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행위는 아무래도 자연스럽지가 않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어린 그들의 곁에서 누군가가 부추기고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자매를 강요하거나 주선하고 글을 모르는 그들을 대신하여 문기까지 작성해주지 않았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전 교수는 한국학 계간지 '문헌과해석' 제60호에 발표한 연구논문 '조선후기 한양에서 활약했던 자매(自賣) 알선자들'에서 조선후기 자매 알선업자들의 실태를 조명했다.

자매 알선업자의 존재는 '승정원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748년(영조 24) 2월 27일 포도청은 한양에서 전문적으로 양인을 노비로 속여 팔아먹은 이도언, 조만채, 윤봉창 일당을 체포한 뒤 그들의 죄상을 왕에게 보고했다.

전 교수는 이들 일당이 "주로 지방에서 상경해 자매를 원하는 노비나 양인들에게 거짓으로 노비문서를 작성해주고 매매를 알선한 후 수수료를 받아 챙겼다"고 소개했다.

또 "한성에는 이와 같은 자매 알선 조직이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자매는 불법이었기 때문에 자매 알선업자들은 양인인 자매자의 신분을 노비로 속이기 위해 위조문서를 작성한 뒤 이들을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을 물색했다.

알선업자들은 또 일정하게 정해진 수수료율은 없었지만 대략 몸값의 4분의 1에서 2분의 1 정도의 수수료를 받아챙겼다.

전 교수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전기에 비해 노비들이 더욱 빈번하게 도망쳤다"면서 "그러나 한편으로는 흉년과 기근 등이 반복해서 일어나자 먹고살기 위해서 평민들이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노비로 자매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 후기에 도망치거나 속량하여 천민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는 노비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비 제도가 유지되고 노비가 존재했던 것은 꾸준히 노비가 재생산되었기 때문"이라면서 "그 이유의 하나가 바로 이 자매에 있었다"고 분석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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