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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바라보는 한일 시각차 여전

광개토대왕비 바라보는 한일 시각차 여전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기록한 광개토대왕비는 19세기 중국 지안(集安)에서 발견된 뒤 한중일 사학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비문(碑文)의 해석을 둘러싸고 그동안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다.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신묘년(辛卯年.391년) 기사다.

일본은 신묘년 기사를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 □는 훼손된 글자)고 해석하며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1972년 재일 사학자 이진희 교수가 일본이 비문을 변조했다고 주장하기 전까지 신묘년 기사는 4세기 후반 일본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벌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됐다.

이진희 교수의 연구 이후 국내 학계에서도 일본의 비문 변조설이 잇따라 제기됐다.

신묘년 기사는 '광개토왕비의 재조명'을 주제로 18일 개막한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국제학술회의에서도 여전히 뜨거운 문제다.

일본의 저명한 한국고대사 연구자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도쿄대 교수는 기조 강연문 '광개토왕비 연구의 제문제'에서 광개토왕비가 발견된 지 10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장 뜨거운 주제는 신묘년 기사 해석 문제라고 밝혔다.

다케다 교수는 문제의 신묘년 기사는 같은 해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기록한 본문 앞에 배치돼 있기 때문에 통상 전치문(前置文)으로 불린다면서 각 연도의 전치문은 "고구려에 있어 불리한 국제정세를 기술, 강조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예외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신묘년 기사 역시 불리하고 곤경에 빠진 대외정세를 중심으로 기술한 기사로 보인다면서 "'왜는 신묘의 년(年)에 바다를 건너 와서 백잔(백제)을 파(破)하고 동쪽에서는 신라를 □해서 신민으로 삼았다'와 같이 해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광개토왕이 즉위한 신묘년 당시 고구려는 남방 방면의 국제정세가 급격히 불리하게 전개되고 곤경에 직면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고 추정했다.

요코하마시립박물관의 스즈키 야스타미(鈴木靖民) 연구원도 신묘년 기사가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를 파하고 신라를 □해서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스즈키 연구원은 논문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왜(倭)'에서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고구려에 대해 백제, 신라는 조공의 관계였다는 표현과 같이 그 이전 아마도 4세기 중엽으로부터 동아시아(동북아시아)에서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 국제인식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신(臣)은 주군(主君)에 대한 말이기 때문에 왜는 신민을 통치하는 왕을 갖고 백제, 신라에 우월해 고구려에 대항하는 세력으로서 비문을 쓴 사관 등에게 인식됐다"고 해석했다.

이에 대해 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일본 학자들과는 다른 해석을 제시했다.

연 연구위원은 논문 '광개토왕비에 나타난 고구려의 남방 세계관'에서 "고구려의 눈에 비친 왜는 고구려의 남방정책의 방해자였고 비문 기술의 핵심적 전제로서 자리매김되었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광개토왕의 즉위 해인 신묘년 기사의 탄생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으며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게 강한 왜의 이미지를 출현시켰다"고 분석했다.

또 "비문에서의 왜는 '왜적퇴'(倭賊退) '왜궤'(倭潰) '왜구궤패'(倭寇潰敗)'와 같이 격퇴와 섬멸의 대상"이었다고 지적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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