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 ‘양심고백’, 뭔가 진실함이 느껴집니다. 죽기 전 고백했으니 순도 100%의 진실 같습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은 지난 해 간암으로 숨지기 일주일 전 그런 양심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죽인 사람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진실로 속죄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공범까지 불었습니다. 그가 지목한 공범은 같이 연쇄 살인 사건을 저질러 죗값을 치르고 있는 46살 이 모 씨입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현재 성동구치소에 수감돼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공범으로 지목한 자가 야속해도, 이미 세상을 떠나 하소연할 수도 없습니다.
양심고백에 담긴 ‘또 한 건의 살인’은 2004년 8월 서울 명일동에서 벌어진 주부 살해 사건입니다. 범인이 대낮에 아파트의 열린 현관문으로 침입해 40대 주부를 잔혹하게 살해했는데, 8년 묵은 장기 미제 사건입니다. 당시 관할인 서울 강동경찰서가 수사본부를 꾸리고 범인 검거에 달려들었지만,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습니다. 용의자 특정에도 실패했습니다. 8년 뒤 지금, 구치소 '양심고백'을 단서로 다시 범인 검거에 나선 건 옆 동네인 서울 광진경찰서 형사들입니다. 죽은 자의 양심고백을 바탕으로 46살 이 씨를 찾아가 끈질기게 추궁하기 시작했습니다. 작년부터 14번을 찾아갔다고 경찰은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이 씨의 ‘자백’을 받아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는 그의 자백 말고 새로 확보한 증거가 없습니다. 경찰 브리핑에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었습니다.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인데, 사건 현장에서 나온 DNA 감식 시료가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답변은, 8년 전 수사한 강동경찰서에서 4백여 건의 감식 시료를 넘겨받아 국과수에 분석을 의뢰했는데, 이 씨의 것으로 확인된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씨를 공범으로 지목한 양심고백 당사자의 DNA도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주부가 살해된 아파트의 집안과 주변 복도에서 채취한 머리카락, 담배꽁초 등에서 아무 것도 안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씨가 사건 당일 그 범행 현장에 갔다는 정황 증거가 없습니다.
이상한 건 또 있습니다. 광진경찰서가 받은 이 씨의 피의자 진술조서에 따르면, 그는 아파트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 문이 열린 집에 들어간 뒤, 주부에게 흉기를 휘둘러 살해하고,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뒤 달아났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사건을 처음 수사한 강동경찰서 관계자는 당시 엘리베이터 CCTV에, 자백한 이 씨의 모습이 찍히지 않았다고 확인했습니다. 엘리베이터 CCTV에는 없어도 아파트 1층 로비에 설치된 CCTV에는 꼬리가 잡혔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습니다. CCTV에 이 씨가 찍히지 않았는데, 피의자 맞습니까? 광진경찰서 수사팀의 답변은 “당시 CCTV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강동서와 광진서의 말이 엇갈립니다.
한 가지 더. 이 씨는 광진경찰서 조사에서, ‘누워 있는’ 주부에게 흉기를 휘둘러 살해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주부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는 다릅니다. 시신에 난 상처의 깊이와 각도 등을 분석하면, 범인과 피해자의 자세를 추정할 수 있는데, 2004년 국과수와 경찰의 판단은 범인이 ‘서 있는’ 주부에게 흉기를 휘둘렀다는 것입니다. 국과수의 분석이 틀린 걸까요, 아니면 8년 지난 이 씨의 기억이 흔들린 걸까요, 진술은 정확히 한 걸까요? 그가 필로폰을 투약하고 환각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억의 정확함과 진술의 일관성에 좀 의문이 들지만, 그렇다고 피해 여성의 자세까지 오락가락 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재판 가면, 충분히 유죄 받을 수 있어요? 수사팀은 호언장담했습니다. 특히 현장 검증에서 진범만 알 수 있는 사실을 그가 진술하고 정확히 재연했다고, 경찰은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피해 주부는 현관문 앞에 쓰러져 숨졌는데, 그 위치를 알고 있었고, 주부는 흉기에 목을 다쳐 사망했는데, 그 상처 부위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광진서 수사팀은 피의자 진술조서를 받기 전, 강동경찰서의 이전 수사 자료를 일절 들춰보지 않았다며, '짜맞추기 수사'는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어쨌든 그를 추궁해 자백을 받아냈고, 진범이 알 만한 사실을 진술했으니, 범인이 틀림 없다는 것입니다. 현장검증을 제대로 한 것인지 당시 경찰이 촬영한 영상을 꼼꼼하게 따져보고 싶었지만, 경찰은 언론에 단 3초의 동영상만 찔끔 제공했습니다.
이 사건 보도는 이래서 상당히 고민스러웠습니다. 경찰이 검거한 모든 ‘피의자’는 말 그대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을 받는’ 사람이지만, 많은 경우 범행 현장의 CCTV나 똑 떨어지는 DNA 때문에, 기사에서 의심이 아니라 확실한 범인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자발찌를 차고 주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게 아니라 정말 '살해한' 서진환은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검거돼 말만 ‘피의자’지 아예 ‘범인’이라고 쓴 언론도 다수였습니다. 나주에서 초등학생 여자 어린이를 성폭행한 혐의가 아닌, 정말 성폭행한 고종석도, 피해 아동으로부터 그의 DNA가 검출돼 재판 절차만 남았을 뿐, 부인할 수 없는 범인으로 간주됐습니다.
반면, 명일동 주부 살해 사건은 이와 다릅니다. 죽기 전 양심고백을 했다는 사람은, 경찰이 피의자 진술조서를 받지도 않았고, 범인으로 지목된 이 씨는 경찰의 끈질긴 추궁에 자백했지만, 본인도 자신의 범행이라는 걸 입증할 만한 증거가 마땅치 않습니다. 아파트 CCTV도 없고, 주변 CCTV도 없고, 진술도 일관성이 없습니다. 두 사람은 8년 전 수사팀의 용의선상에 오른 적도 없습니다. 8년 미제는 단번에 해결됐지만, 경찰 수사에 다소 회의적인 기사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진범이 맞나? 자백만 있는데? 이런 분위기를 풍기면서 보도했습니다. 그는 정말 ‘피의자’인 것입니다. 물론 그의 자백이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고, 정황상 강도살인죄가 인정될 수도 있지만, 그를 확실한 범인으로 보도하는 건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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