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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日 양심 "위안부 진실 외면 말라"

[취재파일] 日 양심 "위안부 진실 외면 말라"
‘위안부 진실 전도사’로 불리는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 주오대 교수를 만났습니다. 요시미 교수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한 1993년 고노 관방장관의 담화를 이끌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분입니다. 요시미 교수는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견한 일본군 공문서 6점을 지난 1992년 1월 아사히신문에 제보해, 결국 일본 정부가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위안부 문제 진상조사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지금까지 20여 년간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쓰시고 있습니다.

요시미 교수님이 보여주신 자료와 인터뷰 등 취재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해 많이 알게 됐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잘 모르는 부분이 많은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논리로 무장한 일본의 우익이 억지를 부릴 경우 공부와 준비가 부족하면, 조목조목 그들의 논리의 허점을 따지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내에서 우익의 끊임없는 협박과 갖가지 공세에 시달리면서도 꿋꿋이 맞서 오신 요시미 교수님의 연구 내용을 인터뷰 형식으로 소개할까 합니다. 인터뷰로 부족한 일부 내용은 교수님이 저술한 책을 참조해 정리했습니다.

- 선생님이 발견한 6점의 일본군 공문서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위안소의 설치, 운영과 관련해 일본 참모부가 중국 지역의 각 부대로 보낸 공문서들입니다. 간략히 내용을 소개하면, 먼저 1938년 7월의 공문서에는 중국 내 일본군의 성폭행 사건이 빈발해 반일감정이 심각해지고 있다며 서둘러 위안소를 설치하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에 앞서 1938년 3월의 문서에는 위안부 모집 운영업자를 선정할 때 지방 헌병, 경찰과 협력할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들은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모집이 민간업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필요와 계획, 명령에 의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이뤄졌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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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942년의 문서는 중국 남부 일본군의 후방지원을 맡은 부대의 기록인데, 각 부대가 통제하고 관리하는 위안부의 숫자까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군인 100명당 1명의 위안부가 필요하다며 구체적인 할당인원까지 지시하고, 실제 각 부대가 관리하는 위안소별 위안부의 숫자 850명이 일람표로 정리돼 있습니다. 또 이에 앞서 1938년 12월의 문서에는 일본군이 위안소에 출입하는 병사들의 외출을 통제한 기록이 있습니다. 혼잡을 막기 위해 병사들에게 위안소 출입 티켓을 발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문서들은 일본군이 사실상 위안소를 설치 운영하고, 위안부를 통제해왔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일본 정부는 이 문서들이 공개되기 전, 위안소와 위안부는 민간업자가 설치 운영한 것이지 일본군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주장해왔습니다. 하지만 공문서를 통해 위안소의 설치와 위안부 소집 운영업자의 선정, 그리고 운영과 통제까지 모든 과정에서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깊숙이 관여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결국 일본군이 위안부 문제의 주역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 그러나 우익들은 일본군이 아니라 민간업자가 위안부를 모집했다고 주장합니다만?

“일본군이 직접 나서 위안부를 모집하고 직접 운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공문서에서 보았듯이 위안소의 설치와 계획, 관리, 통제 등 나머지는 모두 일본군이 했습니다. 민간업자의 선정과 필요한 위안부의 인원조차도 일본군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일본군이 모든 것을 세팅해놓고 민간업자들은 지시에 따라 운영만 한 것이죠. 민간업자들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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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은 위안부 여성들이 ‘자유의사’로 ‘돈벌이를 목적으로 위안소에 왔다’고 주장하는데, 이 부분이 허구임을 보여주는 증거도 일본군의 공문서에 나와 있습니다. 일본군은 민간업자들이 위안부를 데려오면 유괴나 인신매매를 일일이 확인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유괴나 인신매매가 명백해도 일본군이 민간업자를 처벌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일본군이 강제연행과 상관없다고 주장하려면, 유괴나 인신매매를 한 민간업자를 처벌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일부 역사학자들은 미군 등도 위안소를 운영했다며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를 정당화하려고 하는데, 일본군이 그들과 다른 점은 군이 위안부 설치와 운영의 주역이었다는 점입니다. 일본군 주도로 이뤄진 조직적인 인권유린, 그래서 전쟁범죄라는 것이 다른 나라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 그렇지만 최근 노다 총리를 비롯해 일본 정치인들이 잇따라 ‘위안부 강제 연행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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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위안부를 강제 동원하라’고 적힌 일본군 공문서가 없다는 것을 근거로 그렇게 주장합니다. 실제 아직까지 일본군 공문서에 ‘강제 동원하라’고 명확히 적힌 문서가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누가 공문서에 ‘위안부를 강제로 모집하라’고까지 적겠습니까? 또 만일 그런 문서가 있더라도 일본의 전시 지도자들이 그대로 남겨 뒀겠습니까? 일본군 지도부는  지난 1945년 항복 이후 미군이 들어오기까지 2주일동안 자신들의 범죄를 입증할 수 있는 문서를 모두 태워 당시 도쿄의 하늘이 검게 물들을 정도로 증거를 없애는데 열중했습니다. 또 지금도 일본 정부는 2차 대전의 역사를 규명할 수 있는 갖가지 자료의 공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정보에 대한 접근 자체가 차단된 것입니다.

그러나 ‘강제동원 명령’이 직접 적힌 공문서를 제외한다면, 일본군이 강제로 모집하는 데 관여했음을 입증하는 증언과 증거는 무수히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과 중국, 타이완, 필리핀 등 아시아 여성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위안부까지 수많은 피해 여성들의 살아있는 생생한 증언이 있습니다. 또 피해자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쟁의 와중과 전쟁 직후 미군 조사 등을 통해 드러난 일본군 지도부의 진술과 퇴역 일본군 병사들의 증언에는, 일본군이 폭행과 협박으로 위안부를 납치해 인권을 유린했음이 자세히 드러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증거가 워낙 광범위하고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결국 증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일본 정치인들이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 왜 우익과 일본의 일부 정치인들이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보십니까? 

“그들은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면 ‘일본의 자긍심’이 훼손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일본군의 전쟁범죄라고는 하지만, 너무 파렴치해 일본인의 자긍심에 금이 간다며 필사적으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형식논리에 매몰돼 이를 ‘협의의 증거’ 즉, 강제동원을 명령한 공문서가 없다며 부인하는 것이죠. 아마 더 명확한 증거가 나오더라도, 그때 가서는 역시 또 다른 핑계를 대며 역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역사를 직시하지 못하고, 진실을 외면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죠.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직접 뵌 요시미 교수의 인상은 ‘아, 이 분은 천생 학자시구나’였습니다. 취재하는 동안 줄곧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으셨지만, 일본 우익의 모순을 지적하실 때는 단호하고 거침없는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일본 우익의 수많은 협박에도 불구하고 결코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지켜온 내적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런 분들이 일본 내에서 갈수록 줄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사와 인권 문제와 관련해 제 목소리를 내는 분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연세가 많이 드신 분들 뿐입니다. 젊은 세대에서는 거의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시간이 갈수록 일본에서 요시미 교수님 같은 분들의 양심의 목소리도 더욱 희미해지고, 역사왜곡 문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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