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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성북동 부촌은 털렸지만…쉬쉬하는 그들의 속내

[취재파일] 성북동 부촌은 털렸지만…쉬쉬하는 그들의 속내
# 성북동, 부촌이 털렸다.

더이상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가 생각나지 않는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입니다. 기본적으로 주택마다 담벼락 높이가 2미터 이상이고 산 기슭에 있어서인지 공기가 맑습니다. 담 안에는 2,3층 주택에 잔디밭이 있고 주변에 소음 나는 건물도 없습니다. 도로가 좁아 차량 통행도 많지 않고 인구밀도가 높지도 않고. 주변에는 웬만한 잡지에 소개될 법한 멋진 상점들도 많습니다. 한눈에 봐도 당장이라도 살고 싶은 동네입니다. 돈이 많다면요.

서울 시내가 내려다 보고 싶을 때 종종 가긴 했어도 취재차 간 건 처음이었습니다. 부러워만 보였던 담벼락이 왠지 두렵게 느껴지더군요.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상가 건물이라면, 사무실이라면 어떻게든 시도해 볼텐데 이들이 이웃 주민들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가장 사적인 공간, '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제가 도착한 곳은 천신일 세중나모 여행사 회장의 집 앞이었습니다. 지난 달 말 이 고급 주택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천신일 회장은 2010년부터 구속 수감돼 있는 상태인데요, 이날 가족들이 오후에 외출하고 돌아오자 귀금속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피해는 수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대체 담은 어떻게 넘었는지, 담 넘은게 아니라면 어떻게 들어간건지. 그야말로 간 큰 도둑입니다. 어딜가나 방범용 카메라에, 집집마다 설치한 보안장비, 담벼락에 사제 CCTV도 여러 각도를 비추고 있는데 말입니다. 천 회장 집을 중심으로 반경 5미터 이내에, 제 눈에 띈 CCTV만 10개가 넘었습니다. 게다가 외국 대사관저가 많아서 자율 방범대도 설치돼 있고, 경찰 순찰차도 수시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피해 규모를 떠나서 상당히 흥미로운 점들이 많았습니다.

# "그런 일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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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천 회장의 집에 찾아갔던 겁니다. 당사자들은 뜻밖에도 '절도 사건 같은 일은 없다'고 딱 선을 그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전언입니다. 초인종을 눌러봤지만 정작 집에 사는 사람들은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한동안 계속된 검찰 수사로 언론에 노출된 천 회장의 가족들이 또다시 낯선 사람들을 만나기 싫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다들 '일하는 사람'이라면서 도난 사건이 없었다, 있어도 알려줄 리 없지 않느냐고 되묻더군요. 난감했습니다.

주변에 물었습니다. 그런 큰 일이 있었는데 혹시 아는 내용이 있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10명이면 10명 모두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마트 주인도, 경비 초소를 지키는 경비원도, 옆 집 이웃도, 모두들 "그런 일 없는데요?"라는 반응이었습니다. 물론 알고도 이웃의 일이라 말하기 꺼릴 거라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모르는 듯한 표정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천 회장의 집에 다시 찾아갔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집안 사람들의 주장과 다르게, 보안 업체 직원이 장비가 오작동한다며 수리를 하러 오질 않나, 이젠 경찰이 집 앞에 형기차를 주차해 놓고 한시간 동안 나오질 않더군요. 

관할 경찰서에 문의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다짜고짜 '소설 쓰지 말라'고 하더군요. 경찰이 집을 드나드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는데도 말입니다. 경찰이 딱 잡아 떼니 할 말이 없었지만, 그간 취재한 내용이 모두 거짓일리 없으니 '천신일 회장 집 털렸다'는 보도는 8시 뉴스에 나갔습니다. 이후 경찰은 '절도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은 맞다'고 인정했습니다.

# 소극적인 이들의 속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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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사건은 우리 주변에 너무도 흔합니다. 옆집 아저씨가 도벽이 있어서 대낮에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물건을 훔쳐 가기도 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70대 할아버지가 늦은 밤 빈 공사장에 들어가 철골 자재를 훔치기도 합니다. 대부분 피해자가 경찰에 도난 사실을 알리고, 가급적 범인을 빨리 잡아서 훔쳐간 물건을 돌려받으려고 하지요.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습니다.

경찰은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알리지 말아달라는 부탁이 있어 사실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는군요. 하지만 문제는 거액의 절도 사건이 이 뿐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비슷한 시기 성북동의 다른 집도 털릴 뻔 했습니다. 같은 인물의 소행일지, 아니면 전혀 다른 별개의 사건으로 봐야 할지, 발생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 경찰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공교롭게도 CCTV에는 용의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단 한차례도 찍히지 않았다는군요. 

2008년에 서울의 한 국회의원의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도난 사실을 뒤늦게 안 가족들의 신고로 지구대 소속 경찰이 현장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몇시간 뒤 부랴부랴 경찰에 전화를 걸어 수사를 의뢰하지 않겠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현장 조사를 한 지구대 경찰에 따르면, 가족들은 당시 현금 7백만원을 포함해 귀금속 등 금품 1억여원 어치를 도난당했다고 했지만, 알고보니 귀금속 등은 국회의원 재산신고 내역에 없던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의원은 당시 '개짖는 소리에 놀라 가족들이 신고한 것일뿐 도둑이 든 적은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도둑 좋은 일만 한 셈이지요.

쉬쉬한다고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수사 기관도 피해자의 요청에 답답하긴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지만 외부인들에게 철저히 가려진 성북동 고급 주택이 절도범들의 관심을 끄는 범행 대상이 아닐지, 다시 한번 고민해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한번 들어가면 거액을 훔칠 수 있으니 오히려 절도범들이 선호하는 곳은 아닐지, 섣부른 걱정도 해봅니다. 자율방범대, CCTV, 순찰, 이 모든게 무용지물이 되는건 아닌지 이쯤되면 냉철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쉬쉬하는 사이, 범인은 또다른 범행을 준비하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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