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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80년만에 무너진 금녀의 벽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의 결정이 뉴스가 되는 이유

[취재파일] 80년만에 무너진 금녀의 벽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번 치고 싶어하는 골프장이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이라고 합니다. 미국 프로골프에서 첫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가 열리는 바로 그 골프장입니다. 철저한 회원제 골프장(영어로 프라이빗 Private 골프장)인데 문제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쉽게 회원이 될 수 없다는 거죠. 기존 회원들의 동의가 있고, 빈 자리가 생겨야 한답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회원 명단이나 가입비, 연회비처럼 회원과 관련된 모든 내용이 다 대외비라고 합니다. 알려진 게 없다는 거죠. 미국 언론들의 집요한 추적속에 일부 회원 명단이 보도된 적이 있기는 합니다. 회원 수는 300명 정도고 세계적 갑부인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잭 웰치 등의 이름이 들어 있었습니다. 평균 연령이 70대고, 대부분 미국 동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백인들이라고 합니다. 물론 오거스타 측에서 확인해준 적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지만 세상이 다 아는 딱 하나 확실한 게 있습니다. 1932년 이 골프장이 만들어 진 뒤 80년 동안 여성은 절대 회원이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설립자이자 초대 회장인 클리포드 로버츠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마스터스의 모든 선수는 백인이고, 캐디는 모두 흑인일 것이다.” 미국 건국 이후 지금까지 상류층을 의미하는 뜻의 WASP(White Anglo Saxon Protestant)들의 권위의식을 대변하는 말인데요, 바로 이런 인식이 여성회원을 거부하는 결정적 배경이라는 해석들이 많습니다. 다만 흑인들은 늦기는 했지만 1975년부터 마스터스에 출전할 수 있었고, 1990년부터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의 회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여성들은 회원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의 선진국이자 성 평등을 주요한 사회 원칙으로 삼고 있는 미국의 모순거리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 측을 겨냥해 미국 여성계는 강도 높은 비판을 계속해 왔습니다. 10년 전인 2002년에는 미국 여성단체협의회가 당시 오거스타의 회장이었던 후티 존슨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면서 미국 전역에서 오거스타의 금녀의 원칙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뉴욕타임스가 사설을 통해 오거스타 측을 맹렬히 비난했고, 그 해 마스터스 우승자였던 타이거 우즈는 여성계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오거스타 골프장의 회원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적인 단체가 갖고 있는 원칙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며 외면했던 거죠.

하지만 며칠 전 결국 오거스타는 두 명의 여성을 회원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면면 또한 화려합니다. 곤돌레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 그리고 사우스 캐로라이나의 명성 높은 여성 기업인 달라 무어가 80년 오거스타 금녀의 원칙을 깬 주인공들입니다. 현재 오거스타 회장인 빌리 페인은 지난 월요일에 발표한 성명을 통해 여성 회원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격을 갖춘 많은 후보들의 회원 가입 여부를 면밀히 검토했습니다.다른 회원들의 가입 여부를 결정할 때처럼 두 분의 여성 후보들도 똑같은 조건을 놓고 토론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라이스 전 국무장관과 달라 무어 CEO의 회원 가입이 확정됐음을 알립니다.”

골프광으로 알려진 라이스 전 국무장관과 무어도 즉각 화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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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골프 역사와 전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 그리고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골프 게임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는 마스터스를 존경해왔습니다.”(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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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제 상상 속에 있었던,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인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의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게 돼 영광입니다.”(무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미국 언론들은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지난 4월 마스터스 대회가 결정적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마스터스 대회가 열릴 때면 항상 후원사 회장들이 마스터스 회원의 상징인 그린 재킷을 입고 미디어 행사를 갖습니다. 그런데 올해의 경우 오랜 후원사였던 IBM의 회장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습니다. IBM 회장에게 자동적으로 회원 자격을 줘야 했지만 오거스타측은 지니아 로메티 회장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끝내 회원 자격을 주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로메티 회장은 그린 재킷이 아닌 핑크 재킷을 입고 미디어 앞에 서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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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스타의 이런 행보는 많은 미국인들과 골퍼들에게 오만함으로 비춰졌고, 오거스타 측은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꼴통 집단이라는 거센 비난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지난 4월 이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더 이상 여성 회원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거죠. 라이스 전 국무장관과 스탠포드대 동문인 타이거 우즈는 “오거스타의 결정을 환영한다. 골프계에게는 중요한 결정이다. 무엇보다 오랜 친구인 콘돌리자의 회원 가입을 축하한다.”고 밝혔습니다. 올해 마스터스 챔피언인 눈물 많은 남자 버바 왓슨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지금 이 시대에 여성 회원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오거스타의 전통에 해가 된다는 말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공화당 대선후보인 롬니도 트위터를 통해서 “라이스 전 국무장관이 오거스타의 첫 여성회원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인터넷도 난리가 났습니다. 여성들의 댓글이 많이 보였습니다. CNN을 비롯한 언론사의 관련 기사에 실린 댓글 중 일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미국 내에 존재하고 있는 제도화된 편견을 깨는 터닝 포인트다. 그런데 우리가 오거스타에 감사해야 하는 건가?”
“이제서야 여성 회원을 받아들인 곳이 사우디 아라비아가 아니라 미국의 오거스타 골프장이란 말인가?”
“잘 한 결정이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30년은 늦은 결정이다.”
“오거스타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되는 날을 살아서 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성차별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미국은 하나의 교본처럼 “미국은 이렇게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지적을 하는 기사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오거스타의 첫 여성회원 가입 허용 결정은 미국에도, 특히 미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돈 많은 백인 주류사회 내부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여성에 대한 차별 의식을 역설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오거스타의 결정을 보면서 저는 4년 전 미국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이 떠올랐습니다. 버락 오바마 후보와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과연 누가 미국의 역사에 기록될 대통령이 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한 접전을 펼쳤습니다. 오바마가 되면 첫 흑인 대통령이 되는 것이고, 클린턴이 되면 첫 여성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죠. 경선이 시작될 때만 해도 많은 미국의 언론들은 남편의 불륜이 가져온 집안과 민주당 정권의 위기를 강한 정치적 의지로 넘긴 클린턴의 우세를 예상했습니다만, 결과는 오바마의 승리로 끝났고, 결국 오바마는 200년 조금 넘은 미국 역사에서 누구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흑인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결과를 지켜 본 저의 미국인 친구들은 “미국 사회에서 인종의 벽보다는 남녀의 벽이 더 높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고 지적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서 오거스타가 흑인들의 회원 가입을 이미 22년 전에 허용했다는 사실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오거스타 골프장이 여성 회원을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이 2012년 지금 이 시대에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많은 미국인들에게 주요 뉴스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집권당이 대통령 후보로 여성을 선출한 우리나라의 올해 대통령 선거 결과도 그런 면에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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