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취재파일] 파산신청 경력은 주홍글씨?…"통장개설도 안 돼"

[취재파일] 파산신청 경력은 주홍글씨?…"통장개설도 안 돼"
건강한 사회는 패자부활의 기회가 마련된 사회입니다. 요즘 주식시장 상장 이후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있긴 하지만 미국의 페이스북이나 징가, 트위터 같은 신생 기업들이 등장하려고 해도, 아이디어만 가지고 벌인 사업이 실패했을 때 재기의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빚더미에 올라서 사회 생활을 못하게 돼 누구도 도전하지 않게 됩니다. 패자부활의 기회를 주는 여건은 점점 창의성이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더욱 중요합니다. 실제 선진국일수록 패자부활의 기회가 많은 편입니다.

우리 사회는 외환 위기, 카드 대란 등 큰 경제적 충격을 받으면서 신용불량자, 파산자 등이 급증했습니다. 그때 사회문제가 심각해지자 뒤늦게 패자부활을 위한 법적인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법인의 경우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고, 개인의 경우 개인파산제도입니다. 개인파산제도는 사업 실패 등으로 빚을 진 뒤 이 빚을 갚으려고 노력을 했는데 직장마저 잃어 소득이 없거나 질병으로 채무 상환이 어려워진 사람들이 법원에 파산을 신청하면 이를 심사해 빚을 탕감해주는 제도입니다. 파산 신청이 인용되면 금융거래가 중단되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 법원이 면책을 하면 대출을 제외하고는 정상적인 금융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혹시 남의 빚을 갚지 않기 위해 제도가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법원은 비교적 조건을 엄격히 따져서 파산신청을 인용합니다. 파산 신청이 되면 법원이 각 은행에 해당 사실을 통보해 금융거래가 정지되고 파산 면책을 받으면 다시 법원이 은행에 통보해 정지된 금융거래를 허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민 금융기관을 표방하는 NH농협은행에서는 파산신청 경력이 일종의 주홍글씨처럼 작용해 왔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취재 중 만난 안 모씨는 10년 전 사업이 망해서 수 억원의 빚을 졌고, 이후 신용회복위원회에서 채무조정을 한 뒤 버스 운전을 하면서 빚을 갚아나갔습니다. 착실히 빚을 갚아나갔는데 과로로 쓰려지게 돼 빚을 갚기 어려워졌고 주 채권 은행이던 국민은행의 권유로 개인 파산을 신청해 인용됐습니다. 2007년 법원에 파산 신청을 했고 그 이듬해 파산 면책자가 돼 빚 탕감을 받았습니다.

이미지
 
제2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안씨는 트럭운전을 하면서 열심히 생활했습니다. 금융거래가 허용됐다고 해서 국민은행과 기업은행에서 통장도 만들고 신용이 쌓이면서 신용으로만 최신형 휴대전화를 개통할 수 있을 정도가 됐습니다. 하지만 최근 청약통장을 만들기 위해 집 근처 농협은행을 방문하고선 좌절을 겪었습니다. 안 씨 전산기록을 보고 몇 군데 알아보던 은행직원은 본점의 지침이라면서 안씨에게 통장개설조차 거절했습니다. 과거 은행에 손해를 끼쳤던 사람인 만큼 거래를 할 수 없다는 취지였습니다. 안씨는 파산신청 당시 농협에 카드 빚 200~300만 원 정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방침은 법적으로 마련된 파산면책이란 제도의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것이란 점입니다. 파산 면책자에게 재활 기회를 줘 낙오되는 대신 일을 통해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만든 제도인데, 은행에 아무런 위험 요인이 없는 예금 입금조차 막는다면 재활 의지조차 꺾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기둔화 영향으로 법원에 개인 파산을 신청한 숫자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법원 행정처 자료를 살펴봤더니 최근 5년 동안 따져도 57만명이 넘습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파산신청이 인용돼 파산 면책자 신분으로 사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홍글씨 낙인이 있다고 활동에 제약을 두기엔 적지 않은 숫자입니다.

농협은행 측은 취재가 시작되자 내부 시스템을 점검했습니다. 이후 자신들이 파산자로 등록된 사람들이 파산 면책을 받아 통보가 됐는데도 이를 전산상에서 바꿔놓지 않았기 때문에 파산자처럼 금융거래를 거절했던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안 씨처럼 과거 농협과 거래를 했다가 개인 파산을 신청해 금융거래 제약된 사람들을 모두 따져봤더니 423명이었고, 이들에 대해서 전산 기록을 다시 바꿔놓았다고 알려왔습니다. 파산 면책자 정보가 바로 시스템에 반영될 수 있도록 전산 시스템도 점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뒤늦게라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궁금한 것은 과연 이런 문제가 NH농협은행만의 문제일까라는 점입니다. 감독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다른 은행들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알아볼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감독권한이 있는 금융감독원이 이 부분에 대해 점검을 해서 실태파악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없기 때문에 오직 해당 은행들만이 이 사실을 알 것이라 생각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농협은행에 관한 보도가 집중적으로 이뤄졌으니 다른 은행들도 스스로 점검해서 문제가 있다면 고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는 해 봅니다. 패자부활 기회가 다양하게 보장된 사회를 위해서 말입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많이 본 뉴스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댓글

    방금 달린 댓글
    댓글 작성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300

    댓글 ∙ 답글 수 0
    • 최신순
    • 공감순
    • 비공감순
    매너봇 이미지
    매너봇이 작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