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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후임병에게 욕했다가 전역뒤 '날벼락'…사건 전말

'군대 욕설' 전역한 뒤 유죄 판결 논란

[취재파일] 후임병에게 욕했다가 전역뒤 '날벼락'…사건 전말
한 선배의 말이 기억납니다. 판결문을 보고 고개가 끄덕거려지면 기사가 아니고, 고개가 갸웃거려지면 기사다. 사회부에 갓 들어온 후배가 가져온 판결문이 그랬습니다.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습니다. 24살 대학생이 2년 전 군 복무 시절, 후임병에게 욕을 했는데, 이게 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나온 겁니다. 벌금 60만 원. 처음엔 약식명령으로 벌금 100만 원이 나왔는데, 당시 선임병이 억울하다며 법원에 정식 재판을 청구했고, 다시 유죄 판결이 나왔습니다.

피고인 주소 하나만 들고 집에 이틀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선임병의 아버지는 취재진이 집에 찾아왔다는 소식에, 일을 부랴부랴 마치고 부리나케 퇴근했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습니다. 귀한 아들을 22개월간 국가에 충성시켰는데, 후임에게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이제 와서 벌금형이 나온 건 말도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앞으로 취침하십시오, 뒤로 후퇴하십시오" 이러면 군인이냐고 반문했습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아들도, 훈련소에서부터 군대는 사회와 다르다고 배웠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사회 진출을 코앞에 두고 날벼락을 맞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는 법원에 항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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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로 인정된 발언은 간단합니다. 피고인이 2010.11.15 강원도 철원 5공병여단에서 후임병에게 “코를 골면 죽여버리겠다”고 하고, 2010.12.1부터 2011.1.4 사이에 경계근무를 가르쳐 준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후임에게 “미친 새끼, 죽여버린다”고 말해 ‘협박죄’가 인정된 겁니다. ‘모욕죄’도 있습니다. 2011.1에 신병휴가 나갔다가 다쳐서 돌아온 후임에게, 다른 분대원들 보는 앞에서 “왜 아픈 척을 하냐, 왜 우리 분대로 와서 귀찮게 하냐, 장애인 다 됐네, 빨리 꺼져버려”라고 말했다는 이유입니다.

논란은 '군형법'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군형법에도 협박죄와 모욕죄가 있긴 하지만, 상관에게 욕설을 했을 때만 적용합니다. ‘상관 협박죄’와 ‘상관 모욕죄’입니다. 동기나 후임을 협박하거나 모욕한 발언을 처벌하려고 군형법 조항을 뒤져보면 마땅한 조항이 없습니다. 이 사건이 군사법원에 갔으면, 다른 판결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민간법원 판결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피고인 이름만 바꿔서 같은 사건이 배당됐더라도, 판사는 비슷한 판결을 내렸을 것입니다. 후임에 대한 발언이 기소되는 공간과 시간에 따라, 유죄와 무죄를 오락가락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논란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당시 후임병 부모는 할 말이 더 많습니다. 군대 가기 전 건강하고 유쾌했던 아들이 지금도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했습니다. 법원이 인정한 선임병의 죄는 수많은 폭행과 폭언 가운데 일부일 뿐이라고 항변했습니다. 어머니는 신병 휴가를 나온 아들이 유서를 써, 침대 밑에 숨겨뒀다는 기억을 되살리면서 울먹였습니다. 지금도 감정이 북받친다 했습니다. 아들이 군 병원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쌓인 진료기록만 정말 수북했습니다. ‘오죽했으면’이란 말이 어른거렸습니다. 아버지도 가슴이 먹먹하다 했습니다. 귀한 아들을 군에 보낸 이들 부모에게 남은 건, 아들이 입었던 군복 한 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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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분명한 건, 그렇다고 이들 부모가 욕설을 한 선임병 개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있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번 판결의 시작은 후임병 부모의 경찰 고소가 아닙니다. 아들이 전역하고 부모가 한 일은, 사실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에 진정을 넣은 것뿐입니다. 진정 내용을 확인한 군이 조사에 착수했지만, 이미 쌍방이 민간인 신분이어서, 사건이 경찰서로 넘어갔을 뿐이고, 일반적인 형사처벌 절차가 진행됐을 뿐입니다. 부모는 선임병에 대한 악감정보다는, 언어폭력이 곪아 터질 때까지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방치한 군 당국을 더 미워했습니다.

인권위 진정에서 시작돼, 범죄 기록을 갖게 된 선임병은 또 있습니다. 의정부지법은 지난 2월 이 후임병에게 욕설을 한 선임병(역시 민간인)에 대해 징역 4월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습니다. 2010.12에 여단 생활관에서 후임이 군 생활을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미친놈, 담배 피지 마. PX 가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고 말했다는 것이 ‘강요죄’로 인정됐습니다. 강요죄는 벌금형도 없고, 징역형만 있어서, 벌금보다 무거운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경찰 조사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심했다면서 항소를 포기했고, 1심 판결이 확정됐습니다. 한창 나이에 범죄 기록을 갖게 됐습니다. 같은 내무반의 또 다른 선임병 한 명도, 경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번 판결은 특수합니다. 폭언의 피해자가 ‘군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고 지난해 6월 전역했는데, 묘하게 폭언의 가해자와 전역 시기가 비슷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동시에 민간인이 된 이상, 사건을 경찰과 검찰이 조사하고, 민간법원이 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폭언의 피해자가 이를 갈며 내무반 시계를 쳐다보다, 결국 2년이 지난 뒤 폭언의 가해자가 돼 전역하는 군 생활과 다릅니다. 욕설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흔한 악순환의 고리가 아닙니다. 물론 이론적으로야, 전역한 병장이 신병 때 악몽을 떠올리며 옛 선임의 욕설을 고소할 수 있지만, 희망에 부푼 갓 민간인이 사회생활을 '소송'으로 시작하는 일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모든 병장은 너그럽기 마련입니다.

나도 개구리복 입고 욕을 했다고, 뜨끔할 필요는 없습니다. 욕 한 번 했다고, 사회에 나와 언제든 유죄 판결을 받게 되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법원은 협박과 모욕죄로 인정한 발언뿐 아니라, 피해자의 군 생활 전반을 판결에 참고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군대에서 후임병을 악랄하게 괴롭힌 것도 아닌데, 단 한번 욕을 했다고, 민간법원이 벌금형을 선고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고개를 더 갸웃거릴만한 판결이 아닐까요. 욕설을 뱉고 무사하려면, 군대에 말뚝 박고, 군사법원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다는 씁쓸한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것. 욕설과 폭언이 군에서 얼마나 무심하게 유통되는지 보여줍니다. "내가 예전에 말이야!"라면서 네버 엔딩 軍 욕설 스토리를 꺼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욕설과 폭언은 군인의 필수 아이템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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