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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14살 소녀, 산사태 났는데 '김정일 초상화' 옮기려다…

함남의 소녀가 숨진 사연

[취재파일] 14살 소녀, 산사태 났는데 '김정일 초상화' 옮기려다…
6월 11일 함경남도 신흥군의 한 시골마을에서 인풍중학교 4학년 학생인 14살 한현경 양이 폭우로 인한 산사태에 휩쓸려 사망했다. 밤새 내린 비로 산사태가 난 새벽 4시쯤 황급히 대피해야 했던 상황에서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중앙TV가 전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현경 양이 당시 빨리 몸을 피하지 못하고 사고를 당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방 안에 걸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초상화를 안전하게 옮기려고 시간을 지체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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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를 지키려다 산사태에 희생된 한현경 학생, 조선중앙TV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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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현경 양은 이 초상화를 지키려다 사고를 당했다. 조선중앙TV 캡처>

한현경 양의 어머니 증언에 의하면, 산사태가 나던 당시 집에는 외근을 나간 남편 때문에 현경 양 자매와 어머니 밖에 없었다. 산사태가 났다는 소리를 듣고 현경 양 어머니가 화급히 현경 양 자매를 대피시키려고 했는데, 현경 양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를 언급했고 현경 양 가족은 초상화를 비닐 보자기에 감싸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물이 집 밖에 차 올라 출입문도 열 수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현경 양을 창문 밖으로 먼저 내보내고 ‘빨리 피하라’고 했지만, 현경 양은 ‘초상화를 그대로 두고는 못간다’며 기어코 초상화를 안고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산에서 내려 온 흙더미에 현경 양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폭우가 그친 뒤 흙더미에 묻힌 현경 양을 찾아냈을 때 현경 양의 얼굴은 군데군데 찢겨 있었지만 초상화에는 습기 한 점 스며들지 않은 상태였다고 조선중앙TV는 전했다. 현경 양의 작은 손으로 품 속에 꼭 끌어안고 있던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것이다.

현경 양이 남긴 마지막 일기에는...

우리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한현경 양의 죽음. 혹시 북한이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야기를 조작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현경 양이 사망 전날 밤에 썼다는 일기를 보면 현경 양이 초상화를 지키려 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현경 양의 언니가 조선중앙TV를 통해 소개한 현경 양의 마지막 일기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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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현경 양이 사망하기 전날 쓴 마지막 일기, 조선중앙TV 캡처> 

"6월 10일, 밖에선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면 마음이 쓸쓸하다고 하지만, 나는 기뻐 잠이 오지 않는다. 오늘 평양에 갔던 우리 학교 소년단 대표들이 돌아왔다. 경애하는 김정은 선생님을 몸 가까이 모시고 경축행사도 하고 기념사진까지 찍은 그들을 보니 정말 부러웠다. 나도 경애하는 김정은 선생님을 만나뵈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머니는 내가 앞으로 공부도 더 잘하고 좋은 일도 더 많이 하면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온다고 했다. 나는 꼭 경애하는 김정은 선생님께서 아시는 훌륭한 학생이 되겠다."

현경 양의 마지막 일기 내용을 보면 현경 양이 김정은 제1비서에게 동경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평양에 가보고 싶고, 국가적인 대규모 경축행사를 구경하고 싶은 현경 양에게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김정은 제1비서는 어쩌면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위대한 분’을 세상에 있게 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초상화는 현경 양이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보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4세 소녀에게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가 갖는 의미는?
 
한현경 양의 사망 경위가 알려지자, 북한은 현경 양의 죽음을 ‘선군시대의 위대한 희생’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선전전을 펼치고 있다.   

현경 양에게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통해 ‘김정일청년영예상’을 수여했고, 현경 양의 어머니와 교장에게는 ‘국기훈장 제1급’을, 현경 양의 아버지와 부교장에게는 ‘노력훈장’을 각각 수여했다. 현경 양의 담임교원은 ‘공훈교원’ 칭호를 받았으며, 현경 양이 다니던 학교의 청년동맹, 소년단책임지도원과 소년단지도원에게도 ‘국기훈장 제2급’과 ‘제3급’이 수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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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한현경 양에게 ‘김정일청년영예상’을 수여했다. 조선중앙TV 캡처> 

조선중앙TV는 이같은 사실을 ‘보도(뉴스)’를 통해 주민들에게 전하는 한편, [선군시대의 기특한 소녀]라는 제목으로 현경 양의 삶을 기리는 특집방송도 편성했다. 특집방송에서는 현경 양의 친구들과 교사, 가족과 이웃들이 나와 현경 양의 생전 모습을 회상하며 학습과 조직생활에서 모범이었던 현경 양을 칭송했다.

김정은 제1비서는 한현경 양의 소식을 듣고 ‘가슴이 몹시 아프’다면서도 ‘기특한 어린이’라고 언급했다고 조선중앙TV는 전한다. 북한 당국이 현경 양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갖가지 상훈을 수여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의 일환일 것이다. 아마 흙더미 속에서 생을 마친 현경 양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짧은 생을 마치고 이제는 하늘나라에 가 있을 한현경 양. 자신의 목숨보다 초상화를 귀중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현경 양을 떠올릴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비단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14살의 시골 소녀에게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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