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은 한국과 미국이 자동출입국심사제도를 전면시행하기로 한 첫 날이었습니다. 자동출입국심사란 입국심사대에서 미국 심사요원과 영어로 입국심사를 받지 않고 현금자동인출기처럼 생긴 무인심사기계를 조작하는 것으로 입국심사를 대신하는 제도입니다. 말이 안 통하는 다른 나라에 도착했다는 긴장이 최고조에 도달한 상황에서 영어로 뭐하러 왔느냐? 여기 누구 아는 사람이 사느냐? 하는 일은 뭐냐? 등 이런 저런 질문을 받고, 그 걸 이해하고 대답하는 것은 대학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쉽지는 않은 일이죠. 그런 면에서 자동출입국심사제도는 미국을 드나드는 많은 한국분들에게는 희소식입니다.
재닛 나폴리타노 미 국토안보부장관과 권재진 한국 법무부장관이 무인 심사기계 앞에서 약식으로 테이프 컷팅도 하고, 한미 동맹의 또 하나의 상징적인 조치라는 덕담을 주고 받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자동출입국심사제 전면시행을 기념하는 행사가 진행됐습니다. 미국의 국토안보부 장관은 9.11 테러 이후 한층 고조된 미국에 대한 테러 위협에 맞서기 위해 미국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의 신원을 철저히 점검하고 수사기관과 협조해 의심인물의 경우 입국 거부명단에 올리고, 입국할 경우 바로 체포하는 등 그야말로 미국의 안전을 위한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부처입니다. 장관도 상당한 힘이 있죠. 그런 국토안보부 장관과 함께 행사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미국 정부가 한국을 상당히 배려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다만 행사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떠나는 나폴리타노 장관의 모습에서는 그런 배려가 조금은 형식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씁쓸한 뒷맛도 느껴졌습니다.
법무부는 권재진 법무장관이 자동출입국심사제도를 적용받는 한국인 1호라고 설명을 했는데요, 자세히 보니 꼭 그런 것은 아닌 듯 했습니다. 권장관은 행사 당일 입국한 게 아니고 그 전날 들어왔던 거죠. 그런 면에서 보면 무인심사를 받는 장면을 시연했다는 게 보다 정확한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법무부 입장에서는 한미 자동출입국심사제도를 성사시킨 것은 나름 큰 성과기 때문에 이번 행사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제 기억 속에 이 자동출입국심사제에 관한 뉴스 리포트가 이 날 제가 한 것을 포함해 세 개나 있습니다. 지난해 4월 한미가 자동출입국심사제에 합의했을 때 한 차례,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에 왔을 때 또 한차례, 그리고 이번에 전면시행될 때 한 차례 이렇게 말이죠. 지난해에만 미국을 방문한 한국인이 1백만 명을 넘어선 만큼 뉴스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있고, 그런 면에서 법무부는 홍보면에서 쏠쏠한 재미를 본 셈입니다.
그런데 시행 첫 날 이 제도를 이용한 한국인 여행객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행사가 마무리될 무렵 바로 옆 입국심사장으로 인천공항을 출발해 13시간을 날아온 한국인들이 막 들어섰습니다.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한 명씩 심사요원과 만나 영어로 면접하고, 그 다음에 그 곳을 빠져 나오는데 적어도 30분은 걸리더군요.
무인심사기계로 하면 1분이 채 안 걸렸습니다. 저에게 설명해주던 다우닝 덜레스 공항 보안대장은 신이 나서 “이런 효율적인 시스템은 처음 본다. 정말 시간과 수고를 엄청나게 아껴준다. 한국인들 정말 편해졌다”고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입국심사장을 통과한 몇몇 분을 만나봤더니 “심사요원이 마치 범죄인 다루 듯 딱딱하게 취조하듯이 질문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주 미국을 드나드는데 여권에 뭐 조금 이상한 게 있다고 그냥 세워놓고 시간만 끄는 통에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라며 미국의 입국심사에 마뜩찮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동출입국심사제도를 알고 있는 분들은 단 한 분도 없었습니다.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 듯 합니다.
그런데 자동출입국심사제도를 적용받아 무인심사를 받기 위해서는 여간 인내심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왜 그런지 신청과 심사절차를 설명드려볼게요.
먼저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KIS)가 운영하는 SES(Smart Entry Service-대한민국 자동출입국 심사 서비스)에 가입해야 합니다. www.hikorea.org를 통해서. 그리고 미국의 자동입국심사프로그램 GEP(Global Entry Program)에 들어가 신청한 뒤 www.goes-app-cbp.gov에 가입 후 100달러를 수수료로 내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한국의 자동출입국 심사 등록센터를 방문해 범죄경력과 수사경력조회 회보서를 제시해서 심사를 받아야 합니다. 심사관이 확인 후 이상이 없으면 미국측에 이 정보를 보내고, 미국 국경관리청이 이 정보를 토대로 범죄경력 조회 후에 심사 결과를 한국에 통보합니다. 신청인은 맨 처음에 적어드린 하이코리아 사이트에서 심사결과 이상이 없다는 조건부 승인을 받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 다음 조건부 승인일로부터 30일 이내 미국의 GOES 사이트에서 다음에 내가 언제 미국에 들어가는데 그 날 인터뷰를 받고 싶다고 예약을 합니다. 이 예약은 연장이 가능한데 그래도 조건부 승인일로부터 90일 이내 받아야 합니다.
자, 약속한 미국입국날, 일단 다른 때처럼 일반 입국심사를 통해 입국심사를 통과한 뒤 자신이 도착한 미국 공항(미국내 모든 공항이 아니라 25개 공항에서만 인터뷰할 수 있습니다. 법무부 웹사이트 참고하세요.) 의 등록센터를 방문해 지문과 얼굴정보를 제공하고 나야 최종 승인이 나고 가입절차를 마무리지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최소 3주에서 최대 3개월정도 걸릴 것이라고 하더군요.
또 그렇게 자동출입국심사대상이 되더라도 유효기간은 딱 5년입니다. 그렇다면 5년 동안 미국을 한두 차례, 많아야 서너 차례 방문할 것 같은 분은 이 제도를 이용할 이유가 없는 듯 합니다. 그야말로 사업이나 학업, 가족 상봉, 공무 등의 이유로 미국을 제 집 드나들 듯 많이 오가는 분들에게는 물론 대단히 효율적인 제도죠. 승인받을 때까지 번거로운 과정을 잘 견뎌낼 수 있는 인내심은 반드시 갖춰야 할 것 같습니다.
기념행사에 시연까지 마친 권재진 법무장관이 다음 일정을 위해 빨리 가야 한다며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여기까지 오셨는데 특파원들과 간단히 인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자며 잠시 불러 세웠습니다. 일부 특파원들이 “청와대 민정수석 당시 발생한 민간인 사찰 수사 결과가 발표되는 날 미국 워싱턴에 있는 권장관에게 혹시 수사결과 발표를 피해 일부러 온 것은 아닌지, 수사 결과에 대한 입장이 뭔지를 물어봐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권 장관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문제를 물은 특파원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만의 행사가 아니라 미국과 함께 한 행사라서 미국인들도 주변에 많이 있었고, 수사결과가 발표되기 전이었고 하는 등등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권 장관은 공항 행사를 마치고 바로 뉴욕으로 간다고 검찰 사람들은 얘기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 날은 워싱턴에 머물렀더군요. 어쨌든 권 장관은 미국까지 와서 민간인 사찰과 관련한 발언을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어봤어야 옳은 게 아닌가 공항에서 돌아오며 생각해 봤지만 딱히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