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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녹두나물과 변절의 기준

[취재파일] 녹두나물과 변절의 기준
우리가 흔히 즐겨먹는 나물 가운데 녹두나물이 있다. 녹두에 싹을 틔워 기른 것을 데쳐 먹는데 기르는 방법이 콩나물과 비슷하다. 특히 추석의 절식으로 꼽힌다. 하지만 녹두나물 혹은 녹두채라고 하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세간에는 '숙주나물'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숙주나물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신숙주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게 세간의 속설이다. 쉽게 상하는 숙주나물의 성질이 단종을 버리고 변절한 신숙주와 닮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란 설명이다. 이 때문에 '신숙주'하면 절개를 저버린 변절의 상징적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신숙주는 정말 비열한 변절자였을까?

◈ 문무를 겸비한 인재, 신숙주

신숙주는 도승지와 병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사성 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까지 두루 지낸 조선 전기의 대표적 문신이었다. 벼슬만 높았던 것도 아니다. 세조실록, 예종실록, 동국통감의 편찬을 총괄하였고, 조선의 예법서인 국조오례의도 개찬할 만큼 학문적 소양도 깊었고 심지어 외교에도 능통했다.

또 세조 6년인 1460년에는 동북방면에서 야인의 침입이 잦아지자 좌의정에서 강원·함길도 도체찰사로 임명돼 전쟁에 직접 출정하기도 했다. 신숙주는 이 전쟁에서 뛰어난 전술을 구사해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는 등 전공까지 세웠다. 한마디로 출장입상(出將入相),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던 셈이다.

이런 신숙주의 인생에 변곡점이 된 것은 세조의 계유정란이었다.

◈ 인생의 전환점, 계유정란

세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문종은 자신이 병약해 단명할 것을 예견하고 좌의정 김종서 등에게 어린 왕세자를 보필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문종이 죽고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양대군은 1453년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던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해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곧 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황보 인과 조극관, 이양 등을 궐문에서 도륙했다.

계유정난은 분명 도덕적 명분이 약한 정치적 변란이었지만 신숙주는 세조의 편에 서는 쪽을 택했다.

◈ 신숙주를 둘러싼 2가지 해석

신숙주는 계유정란이 일어난 직후 곧바로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또 세조가 등극했을 때는 대제학에 오르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또 성삼문 등 집현전 동료들이 단종 복위를 위해 거사를 준비하다 붙잡히자 이들을 척결하는데 역할을 했고 나아가 금성대군과 단종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삼문은 역모로 모진 고문을 받다 세조 옆에 서 있는 신숙주를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고 한다.  "옛날에 너와 함께 집현전에 있을 때 영릉(세종의 능호)께서 원손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세월이 흐른 뒤에 너희들이 이 아이를 잘 생각하라는 당부가 아직 귓전에 남았는데,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유교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저버린 신숙주는 변절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변절(變節)의 대명사로 남는 불명예를 남겼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다른 평가도 있다.

성삼문이 절개를 지킨 원칙주의자였다면 신숙주는 실익을 따진 현실주의자였다는 설명이다. 가능성도 없는 복위를 꾀하다 부질없이 목숨을 내놓기보다 이미 대세로 굳어진, 백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뛰어난 임금을 택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계유정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현장에 없었다. 외직에 나가 있었다. 문신이었던 만큼 무력에 적합하지 않아 가담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전후 맥락으로 볼 때 그가 변란에 적극 가담한 인물은 아닌 걸로 보인다. 계유정란을 주도적으로 모의한 것은 한명회였다.

단기 필마, 혼자 남은 절망적 상황에서 적진에 뛰어들어 산화하는 게 옳은지, 회유하는 적장에게 투항해  세상을 위해 일하는 게 옳은지 정답은 없는 법이다. 당 태종을 도와 '정관의 치'를 이룬 위징도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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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의 꽃', 그가 불러온 변절 논란

얼마 전 민주통합당 임수경 의원이 탈북자에게 던진 취중 실언이 정치권에 변절자 논란을 던졌다. 한 탈북 대학생이 농담 차원에서 던진 말에 순간적으로 격분했다는 게 임 의원의 해명이다. 당사자인 탈북 대학생의 말을 종합해보면 내용은 이렇다.

"어디 근본도 없는 탈북자 XX들이 굴러와서 대한민국 국회의원한테 개겨?", "그 하태경 하고 북한인권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짓 하고 있다지? 아~ 하태경 그 변절자 XX 내 손으로 죽여버릴꺼야. 하태경 그 개XX", ", "대한민국에 왔으면 닥치고 조용히 살아. 변절자 XX들아. 몸조심 해"

임 의원은 자신의 발언과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것에 대해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말했다. 또 모든 논란은 자신의 불찰로 인한 것이고 자신의 부적절한 언행으로 상처를 입었을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한다고도 했다.

특히 탈북 청년이 자신의 보좌관들에게 '북한에서는 총살감'이라고 말한 것에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져 나온 말일 뿐 자신의 소신과 생각이 그렇지는 않다며 북한 이탈 주민들이 잘 정착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탈북자에게 변절자라고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말이란 한 번 쏟아내면 주워 담기 힘든 법이다. 정치인들이 겪는 설화 가운데 상당수도 실수로 던진 경우다. '실수'라고는 해명 했지만 그녀가 탈북자에게 했다는 말은 그냥 웃어넘기긴 힘든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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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의 잣대, 변절의 기준

임 의원은 자신이 변절자라고 지목한 것은 탈북자들이 아니라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이라고 밝혔다. 학생운동과 통일운동을 함께 한 하 의원이 새누리당으로 간 것을 지적했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하태경 의원은 북한의 3대 세습과 인권 참상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국내 종북 세력이야말로 민주와 인권을 배신한 변절자들이라고 맞받았다.

신숙주의 예에서 보듯, 사람마다 보는 기준에 따라 변절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변절을 판단하기 위해 어떤 잣대를 들이대느냐는 다른 문제다. 신숙주에게 '절개'의 잣대를 대느냐 '실익'의 잣대를 대느냐는 이를 판단하는 사람의 생각을 대변한다.

임수경 의원이 주장한대로 '진영'에 의미를 둘지, 하태경 의원의 반론대로 '가치'에 기준을 둘지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진영'이 형식이라면 '가치'는 내용이다. 물론 하태경 의원의 행보가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임수경 의원이 하태경 의원을 향해 "북한 인권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짓"이라고 비판한 게 사실이라면, 또 이것도 취중 실언을 한 게 아니라면, 임수경·하태경 의원 양측이 말하고 있는 가치 가운데 과연 어느 쪽이 우리 국민의 가치와 더 부합하는지 따져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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