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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제가 포기하면 결국 우리나라가 포기하는 거였습니다"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카이스트 명예교수

[취재파일] "제가 포기하면 결국 우리나라가 포기하는 거였습니다"
“제가 포기하면 결국 우리나라가 포기하는 거였습니다. 보통 사람은 포기해도 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제가 실패해서 안 되면 결국은 한국은 못한다. 이렇게 될 거 아닙니까.”

전길남 카이스트 명예교수.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전 교수의 말에는 절박함이 묻어났습니다. 변변한 경제 기반이 전무하던 시기, 전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의 해외 석학 유치 프로젝트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 때 우리나라가 어떤 상태였냐 하면, 석유 파동 때문에 난방도 제대로 못할 때였어요. 그럴 때 UCLA에서 박사를 마친 저한테 보통 교수 월급의 3, 4배를 제시하며 고국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기사도 있는 차를 주고, 아파트까지 준다고 약속했어요. 근데 주변에서는 다 말렸습니다. 뭐 하러 한국에서 고생 하냐는 거예요.”

냉전시대 소련과 경쟁 과정에서 미군이 개발해낸 인터넷의 전신인 ‘알파넷’을 전 교수는 미국 UCLA에서 유학하면서 접하게 됐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산 컴퓨터 개발에 관심이 많았지만, 전 교수는 알파넷 같은 컴퓨터 네트워크 기술이 앞으로 더 중요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알파넷 기술은 해외 반출이 금지된 군사기술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교수는 현 ETRI의 전신인 전자기술연구원 인력과 함께 자체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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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프로젝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니까 펀딩도 제대로 안됐습니다. 돈이 제대로 안 나오니까,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하기 어려운 기술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아예 안 될 거다. 그런 프로젝트였습니다.”

이런 무모한 한국의 인터넷 프로젝트는 시행착오를 거쳐 꼭 30년 전인 1982년, 5월 말 결국 성공하게 됩니다. 서울대학교 컴퓨터 공학과의 컴퓨터와 구미의 전자기술 연구소의 컴퓨터가 전화선으로 연결된 겁니다. IP주소를 할당 받고 이를 패킷방식으로 연결하는 지금의 인터넷과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속도는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형편없었지만, 컴퓨터끼리 접속했다는 것은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 당시까지 미국에서만 성공한 기술을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인터넷 개발사는 이렇게 가슴 찡한 면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해내야하는 절박함에 탄생했고, 그 결과 우리나라가 IT분야에서 첫 단추를 성공적으로 끼우게 된 겁니다. 전길남 교수는 국내 인터넷 개발의 산 역사로 인정받아 인터넷 30주년 기념행사에서 정부로부터 공로상을 받았습니다. 이미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전 교수가 국내에서 공로를 이제야 제대로 인정받는 것은 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70을 넘은 나이였지만, 아직도 파도타기와 자전거를 선수급으로 즐길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는 전 교수는 포부도 남달랐습니다.

“인터넷 인구가 10년 뒤면 50억 명이 될 겁니다. 전 세계 인구의 75%가 사용하게 될 겁니다. 인터넷이 이 세상에 없으면 안 되는 인프라 시스템이 될 건데, 거기서 한국이 리더십을 가지면 좋겠다는 겁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제 인터넷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걸 한국이 도와줄 수 있을 겁니다. 산업 혁명 때 영국이 한 것과 비슷하게 한국도 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를 보니까 인터넷 관련된 조직이 3, 4개밖에 없어요. 그래서 빠른 시일 내에 10개정도 만들 수 있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더 나이 먹으면 못하니까 조금이라도 젊을 때 하려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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