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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구속했어야 했나? '살인' 놓고 이어지는 논쟁

[취재파일] 구속했어야 했나? '살인' 놓고 이어지는 논쟁
지난 21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중국 동포 44살 이 모 씨가 옛 동거녀인 43살 강 모 씨를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이 씨는 경찰 조사에서 "경찰에 신고를 하고 자신을 조롱해서 화가 나서 그랬다"고 진술했습니다. 단지 화가 나서 사람을 32번이나 찌를 수 있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살인사건을 막을 수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법원이 이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면'이라는 가정 하에서 이뤄진 주장입니다. 왜 이런 주장이 나왔는지,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난 21일로부터 19일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서울 금천경찰서는 지난 2일 중국 동포 이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지난달 21일부터 사흘간 자신의 옛 동거녀인 강 씨를 감금하고 성폭행한 혐의입니다. 그럼 강 씨는 납치된 걸까요? 아닙니다. 경찰 조사에서 강 씨는 이 씨에게 제발로 찾아갔다고 진술했습니다.

강 씨가 말하는 사건 경위는 이렇습니다. 이 씨와 강 씨는 지난해 8월 지인의 소개로 만나 9월부터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잦은 다툼으로 헤어진 후 이 씨와 강 씨 사이에는 크고 작은 다툼이 계속됐습니다. 이 씨는 계속 강 씨와 관계를 이어가길 원했지만, 강 씨가 이를 받아주지 않았고 오히려 동거기간 동안 든 비용이라며 130만 원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이 씨가 강 씨에게 "가만두지 않겠다", "너 죽고 나 죽자" 등 위협적인 문자를 지속적으로 보냈고, 지난달 21일 강 씨는 이 씨에게 협박 문자 같은 것을 보내지 말고, 연락도 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직접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방문이 문제가 됐습니다. 이 씨를 찾아간 강 씨는 사흘간 감금됐다가 이 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도망쳐 경찰에 신고를 했다는 겁니다. 경찰은 이런 강 씨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이 씨에 대해 성폭행 및 감금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합니다.

그런데 이 씨의 주장은 강 씨와 다릅니다. 결코 강제로 성관계를 맺지도 않았고 감금하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자꾸 돈을 달라고 해서 화가 나서 빰을 때린 것은 인정했지만, 감금이나 성폭행 혐의에 대해서는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오히려 강 씨가 자신을 조롱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피해자와 피의자의 주장이 서로 다른 상태에서 신청된 구속영장은 다음날인 3일 법원으로부터 기각됐습니다. 법원은 기각 이유로 이 씨의 주거가 일정해 도주의 우려가 전혀 없고, 방어권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한 이 씨가 18일만에 자신이 강 씨에게 보낸 문자처럼 강 씨를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매우 결과론적이지만, 만약 법원이 이 씨를 구속했다면, 경찰조사에서 나온 협박성 문자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구속했다면, 이 끔찍한 살인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겁니다.

그럼, 정말 법원이 영장실질심사에서 오판한 것일까. 법원의 입장을 하나씩 따져봐야겠습니다. 다음은 영장실질심사를 담당했던 남부지법의 공보판사와의 대화를 통해 정리한 내용입니다.

법원의 영장기각 사유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씨(피의자)의 주거가 일정하고, 방어권을 보장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바로 '방어권'입니다. 공보판사는 이 방어권에 주목했습니다. 방어권은 피의자가 혐의에 대한 방어권, 결국 수사기관에게 의심을 받고 있는 자가 형사 처벌로 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권리를 말합니다. 이 방어권으로 피의자 이씨는 자신의 주장을 펼쳤고, 이 주장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피해자 강 씨와는 상반되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법원은 이 씨의 주장, 즉 이 씨의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판결한 것입니다. 결국, 피해자 강 씨와 피의자 이 씨의 의견이 너무 상충되는 가운데 피의자인 이 씨의 의견을 간과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으로 법원이 판단한 겁니다. 다시 말해 경찰이 법원에 제출한 사건조사기록으로는 피의자의 주장을 무시할 만큼의 결정적인 근거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찰이 이씨에 대해 적용한 성폭행과 감금 혐의에 대해 제대로 소명을 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런데 '죽이겠다'고 30통이나 보낸 문자가 그럼 구속의 이유가 아니였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이 부분이 논쟁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일단, 법원은 이 씨의 성폭행과 감금 혐의 자체에 아닐 가능성을 열어두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씨가 강씨에게 보낸 위협적인 문자메시지 내용도 법원은 심각하게 위협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흔히,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다툼이 있을때, 감정이 심하게 격할 때 할 수 있는 이야기 정도로 인식한 겁니다.

그리고 법원은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법원이 구속 영장을 발부할 때는 증거인멸, 도주 우려, 결정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서로의 의견이 상충되는데다, 구속영장을 발부하기에는 경찰의 소명도 부족하고, 개인의 애증관계로 인한 다툼으로 보이는 사건에 대해서 법원이 내릴 수 있는 당시의 판단은 구속영장의 기각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경찰의 수사가 부족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서울 금천경찰서 형사과장과 사건을 담당했고 영장실질심사에 참여한 수사관의 녹취를 기본으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일단, 경찰은 강씨의 진술에 좀 더 신뢰를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강 씨가 이 씨의 집에서 나오자 마자 바로 경찰서로 찾아와 신고를 한점, 그리고 강씨의 핸드폰에 있었던 위협적인 문자메시지, 그리고 강씨가 이씨를 달래기 위해서 찾아갔다는 진술의 설득력 등 모든 여건이 강씨가 이씨로 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는 수사를 담당했던 수사관은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씨에 대한 구속의 필요성이 있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에 대해 아쉬움은 있지만 불만이 있어 보이진 않았습니다. 법원은 법원의 판단이고 경찰은 경찰의 판단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어느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현장에서 취재하는 기자와 회사에서 취재한 기사를 데스크 보는 선배들과 같은 사안인데도 보는 시각이 다를 때 있죠. 딱 그런 경우에요. 근데, 하필이면 영장을 기각한 피의자가 그런 살인을 저질러서는...."  

수사를 하는 일도, 수사한 기록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도 모두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 정답이 있을 순 없습니다. 최선만 있을 뿐 입니다. 어디서든 자신의 위치에서 항상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경찰은 나름 열심히 수사를 했고, 법원은 나름 열심히 수사 기록을 보고 원칙에 맞게 최선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무고한 생명이 비참하게 희생됐고, 순간의 실수로 또 한사람의 인생도 이제 끝이 났습니다.

법원의 판단과 그 판단을 할 수 있게 하는 경찰의 수사기록. 이 두가지의 조합이 낳은 결과인 불구속 수사.
그런데, 그 불구속 수사 중에 일어난 잔혹한 살인사건. 법원의 오판인지, 경찰의 부실수사인지, 누구의 잘못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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