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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한국과 일본, 모나코의 신경전

[취재파일] 한국과 일본, 모나코의 신경전
동해 표기 문제가 다시 한 번 국민들의 관심사가 됐습니다. 국제수로기구 총회에서 동해 표기 문제를 논의한다고 해서였죠. 덕분에 저도 유명한 휴양지인 모나코로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예전에 장 프랑소와 모리스의 노래로 익숙한 모나코는 천혜의 휴양도시였습니다. 해변에는 따사로운 봄볕이 내리 쬐고 있었지만, 국제수로기구의 총회장은 긴장감으로 가득했습니다. 물론 그 긴장감은 80개 회원국 가운데 한국과 일본 대표단에게만 해당되는 거였죠.

사실 국제수로기구는 원래 그렇게 치열하게 토론을 벌이는 조직이 아닙니다. 해상의 교통로인 수로를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인데요, 해도를 만들고 해도에 표시되는 부호나 약자를 통일하는 등의 역할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사무국의 규모도 크지 않고, 5년에 한 번씩 총회를 하면서 기본 사항을 결정하는 것이 활동의 대부분입니다.

1921년 처음 국제수로국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질 때부터 주로 해군과 해양 측량사들의 모임이었고, 총회가 열리는 동안 선상 파티를 하는 등 친목도모의 성격도 강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번 총회 기간에도 러시아 군함이 모나코 항에 정박하면서 리셉션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주로 현역 해군 장성이나 해군 관련 인사들 위주인 회원국 대표들은 한국과 일본의 신경전이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국과 일본 입장에서는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일본은 1927년 국제수로국 회원국의 자격으로 ‘동해’를 ‘일본해’로 바꿔 국제 표준 해도집인 ‘해양과 바다의 경계’를 출판했습니다. 이후 1937년과 1953년, 각각 2판과 3판이 발행됐지만,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의 시기에 우리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일본해’라고 표기돼 있는 이 해도집이 아직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3판은 오류도 많고 그 이후 바뀐 것도 많아서 5년 마다 열리는 국제수로기구 총회에서 늘 4판 개정이 요구돼 왔지만, 동해 표기 문제 때문에 개정판 발행은 번번이 무산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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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동해 표기를 되찾는 것은 세 가지의 접근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가장 확실한 것은 ‘일본해’라는 표기를 ‘동해’로 바꾸는 것입니다. 총회 기간 중에 만난 북한 대표는 누차 이런 입장을 강조하더군요. 북한의 현역 해군 장성인 김철웅 중장이었는데요, 일본의 ‘지명 범죄행위’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쓰면서 ‘조선 동해’ 또는 ‘고려해’라는 표기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해’ 표기가 1927년 이후 계속 쓰여오면서 이미 기득권을 갖고 있고, 따라서 일본이 절대 양보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동해 병기’입니다. 일본해를 포기할 수 없다면, 원래 이름인 동해를 옆에 나란히 쓰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실제로 2002년 국제수로기구 총회에서는 프랑스 주변의 바다 지명 세 군데에 대해 병기 결정을 내렸습니다. 영국과의 사이에 있는 영국 해협은 ‘라 망쉬’, 그리고 도버 해협은 ‘파 드 칼레’와 각각 병기하도록 한 것입니다.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있으면서 스페인 이름으로 돼 있던 비스케이만 역시 프랑스 이름인 ‘가스코뉴만’과 함께 쓰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총회였지만, 프랑스의 요구에 동의했던 영국, 스페인과 달리 일본은 동해 병기에 대해 절대 양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 외교부가 수립한 전략은 국제수로기구를 우회해서 동해 표기를 기정사실화 한다는 것입니다. 국제수로기구 총회에서 동해 표기 문제를 관철시키는 것보다, 표결을 막고 총회의 결정을 지연시키는 것에 방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벌면서 전세계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지도의 제작에 동해 표기를 확산시킨다는 전략입니다. 실제로 동해 병기 비율은 이미 30%에 근접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전략에 대해 지나치게 소극적인 자세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지만, 외교부는 2002년과 2007년의 총회에 이어 이번 총회도 절반 이상의 승리라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우리편이라는 것이죠. 특히 이번 총회에서는 일본해를 기정사실화하려는 일본의 제안이 표결에 부쳐져 단 한 표도 얻지 못한 채 부결됐기 때문에 더 고무적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빼앗긴 이름 동해를 국제적인 표준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그 시점를 미룰 수 있을지는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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