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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양을 속이는 주유소…설마 했던 일이 '사실'

[취재파일] 양을 속이는 주유소…설마 했던 일이 '사실'
주유소에서 기름의 양을 속여서 파는 현장을 적발했습니다. 설마했던 일이 사실이었습니다.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주유기에 양을 속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겁니다. 주유기에 설치된 프로그램은 소비자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했습니다. 주유소에서 주유할때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몇 만원어치 넣어주세요." 라든지 "가득 채워주세요"라고 주문을 합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주유량을 설정할 때 금액으로 설정하거나, 가득 들어갈때까지 주유하면 정량에서 4%부족하게 설정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50L를 주유했을 경우 2L 덜 들어가게 프로그램 돼 있었던 겁니다. 적발 당시 L당 2076원이였으니까 50L주유했을 경우 4천 원 넘게 손해를 본 셈입니다.

또, 단속을 피할 수 있도록 정밀하게 설계돼 있었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은 크게 3가지 였습니다. 첫째, 리터단위로 주유기를 설정해 주유하면 정량이 나오도록 돼 있었습니다. 둘째, 만원, 2만원, 4만원으로 설정된 단축키를 사용하지 않고, 숫자판으로 금액을 설정하면 정량이 나오도록 설정돼 있었습니다. 셋째, 계기판에 있는 '취소'버튼을 3초 이상 누르면 모두 정량이 나올 수 있도록 설정돼 있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충분히 단속을 피할 수 있는 겁니다. 때문에 단속이 참 어려운게 현실입니다.

함께 단속에 나섰던 한국석유관리원의 기동단속반원들도 단속의 어려움을 현장에서 많이 호소했습니다. 의심이 가는 주유소를 상대로 매일같이 힘들게 단속을 하고 있지만, 단속이 너무 어렵다는 겁니다. 양이 부족해서 다시 단속에 들어가면 어느새 프로그램을 조작해 정량이 나오도록 만들어 놓곤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작위로 프로그램을 작동시켜 언제 양을 속이는 지도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지난해 정량을 속여 적발된 주유소는 22건 정도에 불과합니다. 단속이 부실하거나 속이는 주유소가 적기 때문이 아닙니다. 치밀하게 속이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이번 취재에서는 우선 양이 적다는 것을 확인한 후 하루의 시간의 여유를 두고 경찰과 함께 합동 단속에 바로 들어갔습니다. 주유원들을 주유기에서 완전히 격리시키고 직원들이 조작을 할 수 없게 만든 다음 주유량을 측정했고 결과는 마찬가지로 4% 부족하게 주유되는 것으로 현장에서 확인했습니다. 그 사실을 현장에서 인정하는 사장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에 남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주유소에서 오랫동안 일한 직원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사장은 주유소를 3년정도 운영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운영이 됐는데, 최근 들어 인근 도로 공사로 이동하는 차량수가 줄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국제유가가 오르면서 정유사의 공급가격은 계속 오르고, 50m 간격으로 주변에 몰려 있는 주유소들과의 가격경쟁때문에 가격을 올릴 수도 없게 되면서 심각한 경영난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때 주변 지인을 통해 양을 속이는 주유기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유혹에 빠져 대당 250만원을 주고 설치하게 됐다는 겁니다. 궁색한 변명처럼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주유소 시장의 실상이 던지는 메시지가 더 걱정스러웠습니다. 순전히 한 개인의 탐욕만이 불러온 불법행위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 시내의 주유소를 찾아 사장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정유사에서 주유소에 공급하는 평균 공급가격이 L당 1980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 시내 평균 판매가격은 2044원입니다. 주유소를 운영하는 개인 사업자는 1980원에 기름을 사서 소비자에게 2044원에 파는 겁니다. L당 64원 남습니다. 그런데 이 64원으로 인권비 주고 천만원에 달하는 임대료 내고, 운영비 부담하고나면 남는게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정말 요즘 같으면 기름을 팔수록 오히려 적자라로 합니다. 그러니 도산하는 주유소도 점차 늘고 있다고 합니다. 주유소협회 관계자의 자료에 따르면 824개까지 늘었던 서울시내 주유소가 지금은 650개 남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유소의 경영난이 어려워진 데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유업계는 4대 정유회사가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주유소는 4개 정유회사에서만 기름을 받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정유사들에 정한 가격에 일방적으로 따를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정유회사들의 직영주유소가 늘리면서 소비자 판매가격을 낮게 유지하다 보니 개인사업자들은 가격을 올릴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주유소 사장님들은 지금 기름을 비싸게 사서 싸게 팔 수 밖에 없는 구조에 놓였다고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럼 정유사에 가격을 내리라고 해야 할까요? 정유사 입장에서는 공급가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류세와 고도의 설비 투자비, 운송비, 그리고 치솟는 국제유가로 인해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할 겁니다. 정부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재정 수입인 유류세는 포기하지 않고, 정유사나 주유소만 압박합니다. 각자의 입장만 고수하고 있는 정부와 정유사 속에서 무한경쟁에 노출된 영세한 개인사업자들만 버티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이런 현실속에서 불법에 쉽게 빠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주유소의 불법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이렇게 개인 사업자들의 사지로 내몰리면서 이런 불법행위가 만연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양을 속이는 주유소가 더 늘어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현재 적발된 프로그램은 대당 250만 원이면 설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속을 피하기도 쉽게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깔려있는 노트북을 주유기 메인보드에 연결해 프로그램을 설치하기만 되기 때문에 설치도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주유기 업데이트나 검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설치에 부담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이러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것이 확인된 만큼, 그리고 이 프로그램의 유혹에 넘어갈 수 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영세 주유소 사장님들이 많다는 현실이 불안하기만 합니다. 얼마나 많은 주유소가 이런 유혹에 넘어가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양을 속이는 주유소 문제는 단속과 관리감독 업무를 맡고 있는 행정조직만의 몫으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여건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인력도 부족하고 장비도 부족합니다. 그럼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암행 단속과 형식적인 점검으로는 벼량끝에 내몰린 주유소 사장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습니다. 

이번에 프로그램의 정체가 확인된 만큼 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유통시킨 일당을 잡는 게 우선입니다. 하지만, 잡는다고 해도 끝이 아닙니다. 마치 해커와의 싸움과도 같습니다. 좋은 단속 방법으로는 프로그램 전문가와 함께 단속에 나서는 겁니다. 이번에 적발된 프로그램은 제조업체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이상한 프로그램이 설치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출고된 프로그램에 다른 프로그램이 설치되면 식별해 낼 수 있는 전문가와 동행해 점검에 나선다면 좀 더 효율적인 단속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또 새로운 프로그램이 등장할 겁니다. 단속된 프로그램이 경찰과 단속팀에게 노출된 만큼 단속을 피할 수 있는 다른 프로그램이 등장할 겁니다. 끝없는 싸움이 될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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