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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건희 회장 '불호령' 이틀 뒤 삼성에서 생긴 일

지난 3월 21일, 삼성그룹은 삼성전자가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방해와 관련해 과태료까지 받은 사실에 대해 “이건희 회장이 경영진을 강하게 질책했다”며 “앞으로 계열사를 평가할 때 실적 외에 법과 윤리를 얼마나 잘 지키는지도 평가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발표했습니다.

당시 트위터 등 SNS는 물론 다른 기업 임직원들도 삼성이 그룹 차원에서 벌써 6번째나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방해했던 전력이 있는데 마치 전혀 몰랐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며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경영진이 법과 윤리를 거듭 강조했다는 점에서 “삼성이 달라지길 기대한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성그룹이 발표한 보도자료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삼성카드에서 벌어진 일은 ‘진정성’에 대한 의심을 살만 합니다. 삼성카드라는 대기업이 자영업자들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논리를 펴기 위해 있지도 않았던 사실을 거짓으로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민감한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는 한미 FTA를 거론하며 거짓 내용을 담은 공문을 보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 동안 진행된 상황을 먼저 설명 드리겠습니다. 삼성카드는 지금 자영업자들의 모임인 직능경제인단체총연합회로부터 “다음달부터 불매운동을 벌이겠다”는 대상에 올라 있습니다. 삼성카드가 대형 가맹점인 코스트코와 0.7%라는 파격적인 조건의 가맹점 수수료 계약을 체결해 시행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중소자영업자들은 1.5% 가맹점 수수료 적용을 요구하며 그 동안 정치권 등을 압박해 겨우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는데 대형가맹점에게는 그 절반 수준의 수수료를 받고 있다는 불만입니다.

                   



카드사 수익 구조가 뻔한 상황에서 중소가맹점 수수료를 낮추기 위해선 고객들의 부가서비스를 줄이거나 상대적으로 지금까지 낮은 수수료를 내 온 대형 가맹점 수수료를 높일 수 밖에 없는데 삼성카드가 이런 낮은 수준의 수수료로 계약을 하면 다른 카드사에도 영향을 주고 결국 자신들 몫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고 반발합니다. 대상 자체도 골목상권을 놓고 경쟁하는 대형마트라는 점에서 삼성카드가 계약을 파기하고 다시 체결해야 한다는 요구를 해 왔습니다. 여기에 올 연말부터 시행 예정인 수수료 차별 금지에 관한 법률을 조기 시행해 달라는 요구를 삼성카드는 물론 전 카드사와 금융당국에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카드사 모임인 여신금융협회와 함께 협상에 나선 삼성카드가 이 단체에게 보낸 답변서 내용입니다. 삼성카드는 답변서를 보내면서 “코스트코가 계약기간 중 일방적인 계약조건 변경은 국내법상 불공정행위에 해당되며, 국제적으로도 전례가 없어 최근 발효된 FTA 규정상 국제분쟁 사례로 지적될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라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코스트코는 이런 입장을 밝힌 적이 없고, 코스트코와 삼성카드가 체결한 가맹점 수수료 계약은 한미 FTA의 분쟁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습니다. 삼성카드가 거짓말을 한 겁니다. 이 사실이 언론 취재로 알려지자 삼성카드가 서둘러 한미 FTA 관련 내용을 삭제한 공문을 다시 자영업자 단체에게 보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 버렸습니다. 대기업이 한미 FTA를 가지고 이렇게 거짓으로 논리를 펴는데 이용할 수 있다는 ‘사례’가 돼 버렸고, 그룹 차원에서 법과 윤리를 강조한 지 이틀도 안 돼 비윤리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오호석 유권자시민행동 회장(직능경제인단체총연합회 회장)은 “우리를 협상 대상으로 얼마나 무시했으면 이런 거짓말을 공문으로 보내겠냐” 며 강경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진행해 온 협상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며 다음달 1일부터 예정대로 200만 회원에게 삼성카드 불매운동과 삼성카드 거부 운동을 벌이겠다고 밝혔습니다.

삼성카드는 예기치 못한 악재에 당혹해 하는 분위기입니다. 여신금융협회장과 삼성카드 관계자, 오호석 회장이 3자 회동을 하는 자리에서 거론됐던 말을 실무자가 ‘실수로’ 코스트코에서 밝힌 입장인 것처럼 답변서에 포함시켰다며 “전적으로 우리 잘못”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과연 실무자 선에서 할 수 있는 결정인가에 대한 의구심은 남아있지만, 코스트코가 계약 파기에 대해선 한미 FTA를 떠나 강경한 반응을 보였을 가능성도 있기는 합니다.

삼성카드는 0.7%라는 낮은 수수료를 코스트코에서 받는 대신 보통 당일, 늦어도 2~3일이면 주는 카드 대금을 20여일 정도 늦게 주는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코스트코에서는 삼성카드만 결제할 수 있도록 하는 독점조항도 포함됐기 때문에 삼성카드 입장에서는 코스트코가 위약금 없이 다른 카드사와 계약하겠다고 나서는 것만 해도 신경 쓰일 수 밖에 없는 강경 대응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삼성카드의 거짓말 사례는 그룹차원의 ‘윤리경영’이 단순히 경영진의 호통만으로는 안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결과’를 중시하고 그에 따라 움직여 온 직원들에게 이제부터 ‘과정’을 더 중시할 테니 명심하라고 한다고, 또는 이제 과정도 올바르게 하고 결과도 잘 내야 한다고 압박만 한다고 해서 큰 변화를 기대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실무진의 단순 실수”라고 하더라도 그 실수가 이건희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진 지 불과 이틀 뒤에 벌어진 것이라면 그 의미를 삼성이 곱씹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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