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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막말男, 막말女의 사회학

'대중교통수단'에서의 화, 그리고 '여성'의 화

보통 한국인은 情이 많은 민족이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무뚝뚝해도, 정이 들면 간이며 쓸개며 다 빼준다는 우스개 소리도 합니다. 하지만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막말남’, ‘막말녀’ 동영상을 보면 ‘한국인의 情’은 자화자찬에 가깝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지난주 ‘택시 막말녀’ 동영상을 취재했습니다. 아버지뻘인 택시 운전기사가 길을 헤매자 여성 승객이 거친 욕설을 쏟아내는 동영상이었습니다. 누리꾼들은 분노했습니다. 며칠간 인기 검색어에 오르며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대부분 이 여성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하지만 취재를 위해 다른 막말 동영상을 찾아봤는데, 신기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 이런 막말 동영상들을 보면 버스나 택시,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수단’이 막말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막말남’ 보다는 ‘막말녀’에 대한 동영상이 훨씬 많았고, 그에 대한 평가도 가혹했다는 점입니다.

대중교통수단에서의 화

지하철 막말녀, 버스 막말남, 경춘선 무법자 할아버지, 택시 막말녀…. 모두 대중교통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취재에 앞서 학계에서는 왜 대중교통수단에서 이런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을지 알아봤습니다.

우선 공간사회학적 분석입니다. 대중교통수단은 서로에게 애써 무관심한 익명의 공간입니다. 출․퇴근길 신경이 날카로워진 샐러리맨들, 밤이 되면 넘쳐나는 취객들과 노숙인, 무질서와 격의 없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동시에 삼엄한 감시망이 되는 역설적인 공간입니다. 인터넷 마녀사냥의 원조 격인 ‘개똥녀’ 사건도 대중교통수단인 지하철에서 시작됐습니다. 막말 동영상의 상당수는 대중교통수단의 ‘노약자석’을 두고 벌이는 노인과 젊은이의 자리 쟁탈전(?)과 관계가 깊습니다. 익명의 공간인 동시에 무질서의 공간, 동시에 준법정신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공간입니다. 대중교통수단은 무질서를 대표하는 ‘막말’과 감시의 수단인 ‘동영상 촬영’이 함께 병존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입니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현대인들이 결국 익명의 공간에서 화를 풀어내기 쉽다는 심리학적 분석도 있습니다. 나를 잘 아는 공간에서는 위신과 체면 때문에 쉽게 막말을 하긴 어려우니 나를 아무도 모르는 대중교통수단에서는 쉽게 화를 낼 수 있다는 거죠. 커뮤니케이션학의 분석도 일리 있습니다. 소통을 할 수 없는 익명의 공간에서 소통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막말과 동영상 촬영이라는 기형화된 소통을 한다는 것입니다.

학계의 분석이 어찌됐든, 우리사회가 그만큼 우울하고 화가 나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도 많아 복잡한데 상대방이 욕을 해대니 나도 안할 수가 없지 않은가. 안 그래도 버스 운전을 하다보면 열 받는 일이 많은데 욕을 먹으니 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지난해 버스 막말남을 취재했을 때 막말남과 욕설을 주고 받았던 버스 운전기사의 말입니다.

                            


왜 막말男 보다 막말女에 쉽게 분노할까.

또 이상한 점이 발견됐습니다. 막말 동영상을 쭉 훑어보니 막말남 보다는 막말녀 동영상이 더 많았다는 점입니다. 욕은 남성들이 더 많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물론 요즘 여성들도 막말을 많이 한다고는 하지만, 단순히 양적으로 따질 때 여성이 더 많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경찰기자 생활을 하면서 ‘막말’로 경찰서에 온 남성은 많이 봤지만 여성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댓글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막말남의 동영상 댓글을 비교적 이성적입니다. ‘상식’, ‘교양’과 같은 단어가 많이 쓰였습니다. ‘상식이 없다.’니, ‘교양이 부족하다.’니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막말녀 동영상에는 여성을 싸잡아 비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가 감히’, ‘저래서 시집이나 갈 수 있겠나.’란 말이 유독 많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건 여성 비하적인 표현입니다.

동영상을 촬영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그렇지 않을까요. 남성이 막말하는 건 쉽게 말해 크게 얘기가 안 되니 찍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막말은 그 자체로 충격적입니다. 즉 ‘어떻게 여자가…’란 무의식이 나도 모르게 나오게 되니까요.

결국 남성의 막말에는 관대하고 여성의 막말에는 인색할 수밖에 없다는, 성차별적 시선이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막말하는 남자던 여자던 볼성사납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막말남에게 ‘요즘 남자들 왜 저러냐.’란 표현은 쓰지 않지만, 막말녀에게는 ‘요즘 여자들 못쓰겠다.’고 싸잡아 비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취재를 끝내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한 택시기사에게 은근슬쩍 물어봤습니다. ‘택시 막말녀를 알고 있냐.’고요. 기사분이 신이 나서 대답합니다. “요즘 그런 여자들 많다. 홍대 가봐라. 겨울에도 짧은 치마 입고, 껌 씹으면서 욕 찍찍 내뱉는 애들 천지다. 요즘은 남자보다 여자가 애물딴지다.”

글쎄요. ‘택시 막말녀’라는 단편적인 현상이 ‘불량한 여성’의 문제로 일반화되는 것을 보면서 여성에게 정숙함이 얼마나 강요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화를 못 참는 사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여성의 화를 못 참는 사회’가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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