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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재개발, 싸우지 않고 할 수는 없을까?

스위스 취재기 2

[취재파일] 재개발, 싸우지 않고 할 수는 없을까?
요새 서울은 재건축, 재개발 문제로 갈등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는 시대로,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서로의 입장만 각각 내놓을 뿐, 대화다운 대화는 이뤄지지 않는 듯한 모습입니다. 다른 사회적 문제들도 그런 경우가 많죠. 공청회 같은 데서 삿대질을 하면서 언성이 높아지는 정도는 양반이고, 심하게는 멱살을 잡고 나와라, 넌 뭐냐 물리적 충돌까지 빚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두 눈으로 그런 광경을 보면, 갈등이 봉합되기보다 더 벌어지고 상처가 깊어지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나라는 어떨까요.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스위스의 취리히 서부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은 2백년 가까이 방직공장, 조선소, 양조장 같은 각종 공장이 즐비하던 곳이었는데, 도심이다 보니 7,80년대 인건비와 유지비가 뛰어오르면서 하나 둘 버려지게 됐습니다. 서울 시내 구로동이나 문래동에 있던 공장들이 시대가 바뀌면서 외곽으로 옮겨간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당연히 90년대 들면서 이곳에서도 어떻게 지역을 재생할 것이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무려 30만 평, 1제곱킬로미터나 되는 넓은 지역이니만큼 아예 부수고 새로운 도심을 개발하자, 아니다 전통과 현대를 조합해보자 등등,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을 것으로 예측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논쟁 과정을 취재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떤 결과가 나왔느냐가 아니라 그 논의 과정이었습니다. 우리와 가장 다른 점 한 가지는 바로 '인내'였습니다. 우리 같으면 여러 가지 이유, 특히 사업비용 같은 경제적 이유를 들어 최대한 빨리 사업을 추진해 끝내는 것이 목표였을 겁니다. 그런데 취리히 사람들은 빠른 진행보다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것에 더 무게를 실었습니다. 주민과 공무원, 투자자와 도시정책 전문가까지 무려 3년간 대토론을 진행하고서야 개발에 대한 '대원칙'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최대한 공장지대 원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주택 공급도 중요하기 때문에 최소한 20% 이상의 공간은 주택으로 공급한다, 공공 면적을 최대한 확대한다, 주 교통수단이 지상을 달리는 전차인만큼 눈에 확 띄는 1층 개발은 공공성 있게 한다 등등의 원칙이 포함됐습니다.

뭘 3년이나 말만 하면서 보냈을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장점이 있었습니다. 혹시 나중에 누군가 "상황이 달라졌다, 예전에 이야기했던 것 다 무효다"라는 식으로 섣불리 약속을 어기거나 깨자고 나설 수 없게 되는 것이죠. 또 이렇게 진통 끝에 나온 합의를 이뤄낸 만큼, 갈등이 빚어져도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는 사회적 신뢰가 쌓인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돈보다 더 귀한 가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대원칙을 결정했으니 속전속결로 사업을 진행하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취리히 서부 개발은 무려 40년 계획, 그러니까 앞으로도 20년은 더 진행됩니다. 위에 보시는 것이 취리히 시청 지하에 있는 1000:1 취리히 시 모형입니다. 개발을 하려는 사람들은 그 건물 모형을 만들어 와서 이 축소 지도에 그 모형을 맞춰보고 전문가, 주민 등과 함께 대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주변과 조화가 맞는지 심사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또 주민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합니다. '인포센터'라는 사무실을 이 지역에 4년간 열어놓고 수시로 원탁테이블 회의를 갖기도 하고, 개발 내용을 주민들에게 계속 강연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정도 큰 사안에 대해서는 주민투표도 합니다. 3킬로미터짜리 전차를 까는데만 시와 주, 2번에 걸쳐서 주민투표를 거쳤습니다. 이렇다 보니 사실 40년도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취리히 시청을 찾았을 때, 개발 담당 공무원인 다니엘라에게 물었습니다. 40년, 너무 긴 것 아니냐고 말이죠. 이런 우문에 현답이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합의를 하는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물론 빨리 일을 진행하면 좋겠죠. 하지만 많은 사람이 많은 의견을 가지고 논의에 참여합니다. 15년, 20년도 짧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 우리가 하는 일은 또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도 영향을 미치는 일입니다. 아마 우리의 개발계획을 연구하게 된다면 한 가지 단어, '인내'라는 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될 겁니다."

그렇게 모두의 합의로 시작된 취리히 서부 개발은 위 사진에 있는 조선소 공장을 고쳐 만든 첨단 공연장 '쉬프바우', 철강공장을 고쳐 만든 주상복합 '풀스5', 양조장과 첨단 주상복합 건물이 결합된 '미그로스'등으로 거듭났고, 매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2위를 다투는 취리히의 매력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보면, 시장의 비전이나 시의 방침이 맞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주민들이 주장하는 바가 맞는 부분도 역시 있을 겁니다. 하지만 팔씨름 하듯, 혹은 전투를 하듯, '너를 눌러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겠다'는 것은 보기에도 아슬아슬합니다. 우리나라가 이 자리까지 올라서는데 '빨리빨리' 정신이 큰 힘이 됐지만, 반대로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도 적지 않다는 것, 모두들 동의하실 겁니다.

당장은 테이블에 마주 앉으면 소리도 좀 올라가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그런 충동을 참고 대화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실생활, '삶의 질'에 대한 문제라면 당장 더디고 답답한 느낌이 들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걸으며 신뢰를 쌓고 같이 가는 것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입니다. 취리히의 성공 사례를 보고 나니 부럽기도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로는 호수 위 백조처럼, 우아해 보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하고 있는 스위스 알프스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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