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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제약회사 영업사원 집에 약상자가 산더미…이유는?

제약회사에 다닌다는 영업사원의 집에 가봤습니다. 베란다에 한가득 약 상자가 쌓여 있었습니다. 상자 속에도 약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습니다. 영양제, 드링크제, 일반 감기약…베란다 뿐만 아니라 작은 방에도 약 상자가 한 가득이었습니다. 웬 약들이냐고 묻자, 다 자기가 사들인 거라고 말합니다. '제약회사에 다니면 약을 사야 하는건가?' 마음이 착잡하고 씁쓸해지는 취재의 시작이었습니다.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의 하루는 약을 파는 걸로 시작해서 약을 파는 걸로 끝납니다. 영업직이란 특성상 약을 많이 팔지 못하면 부담이 드는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제약회사의 경우는 좀 달랐습니다.

한 영업 사원을 따라가봤습니다. 회사에 출근하자 마자 자신이 담당하는 약국으로 향합니다. 새로 나온 약 샘플이나 책자를 들고 나섭니다. 약사들을 만나 약에 대한 설명도 하고, 농담도 하고, 때론 푸념도 하면서 약을 사달라고 합니다. 평소보다 많이 사는 약사도 있지만, 경기가 안좋거나 재고량이 많을 때는 주문양을 줄이는 약사도 있습니다. 아니, 약사들과 만나서 주문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는 것도 다행입니다. 약국을 방문했는데 약사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다른 약국에서라도 주문양을 늘려야 합니다. 약사들과 늘 같은 양을 계약한게 아니기 때문에 그때마다 닥쳐오는 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해야 합니다. 물론 회사는 웬만해선 판매 목표량을 줄이지 않습니다.

대개 영업사원이 담당하는 약국은 수십 곳입니다. 한 달 동안 팔아야 하는 약은 수천만 원에 달합니다. 보통 한 달의 마지막 주는 판매한 약 대금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약을 판매할 수 있는 날은 20여일, 이 기간 안에 수천만원 어치의 약을 다 팔 수 있을까요? 매일 같이 회사에서는 사원들에게 판매 목표치를 상기시키면서, 퇴근 전까지 목표를 달성하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합니다. 이걸 무시하자니 불이익을 당할 게 뻔하고, 마음 착한 자선 사업가가 나타나 약들을 모두 사 줄리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약사들이 주문하지도 않은 약들을 마치 주문한 것처럼 서류를 작성하고 약을 보냅니다. 일단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서류 작업부터 하는 겁니다. 약사들도 자신이 주문하지도 않은 약을 받아들이고 회사에 대금을 지불할 리 없죠, 약을 반품합니다. 약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계약에 따라 약국으로 옮겨졌다 다시 회사로 돌아오게 됩니다. 영업사원들은 약이 반품될 걸 알면서도 무리수를 둡니다. 일단은 서류상으로 판매 목표치를 달성한 것처럼 해야 한 숨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반품된 약을 놓고 선택은 2가지 입니다. 뒤늦게나마 목표 달성을 하지 못했다는걸 인정하고 회사에 반품 수수료를 내는 겁니다. 수수료는 반품된 약값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적을수록 좋습니다. 아니면 어떻게든 반품될 약을 일단 사들인 뒤 차후에라도 약이 필요한 약국에 다시 파는 겁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지 불필요한 지출이 생기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수수료도 결코 적지 않고, 약을 사들인다고 해도 다시 약국에 팔릴거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누군가의 집에는 약 상자가 쌓여가고, 하루종일 발품 팔아 일하고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데도 빚이 늘어갑니다. 실적 부담을 넘어 약 판매를 모두 책임져야 하는 부담까지 떠안고 살아가는게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의 현실입니다. 우리나라 제약 회사들은 약을 많이 팔아서 먹고 사는 구조라고 합니다. 새로운 약이라고 해도 복제약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떻게든 많이 팔아야 제약회사도 이익이 돌아갑니다. 외국계 회사는 신약을 개발해 특허권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나라 회사의 경우 전체 수익 가운데 약 판매가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 크다 보니 영업사원들의 실적 부담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이 됩니다. 게다가 한미 FTA 체결로 약 시장의 경쟁도 과열되면서 제약회사 직원들은 더이상 피할 곳도 없습니다.

지난해 말, 한 제약회사 영업직 신입사원이 자살했습니다. 혼자 살았던 집에 가 보니 집안 가득 약상자가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약국에 다 팔지 못한 약을 본인이 사들이느라 사채까지 끌어다 썼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누가봐도 회사가 약을 떠넘긴 거지만, 회사에선 아직도 보상 기준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상은 커녕 제대로 된 근로 계약을 가지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를 해주려는 곳도 없습니다. 제가 만난 영업사원 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집에도 이런 말 못할 고통과 함께 약상자가 쌓여있을 것 같아 착잡하고 또 씁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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